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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사진의 털 100 _ 884호 _ 2012.12 _ 가고 오지 말되, 다른 형식으로 오라2023-01-04 21:14
카테고리사진이라는 털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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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오지 말되, 다른 형식으로 오라



‘보는 것’이 곧 일인 내게, ‘볼거리’가 많다는 것은 어쩌면 축복이리라.



나의 ‘보는 일’은 목격일 수도, 응시일 수도, 관찰일 수도, 방관일 수도 있는데, 펼쳐진 광경의 성격에 따라 나의 ‘보는 태도’와 ‘보는 방법’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시각이란, 그저 보는 것만은 아니다. 시각이 인간의 감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감각으로 자리 잡게 된 이유는, 사고의 근간이 되는 정보가 시각을 통해 운반되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점점 더 시각정보에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그저 바라볼 뿐이라 말할 때도 있지만, 그것마저도 사실은 그저 바라볼 뿐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타자라는 풍경을 바라본다. 타자는 나를 비추는 오묘한 거울을 가진 자다. 그러니 그저 바라볼 뿐인 행위란, 실로 불가능할 수밖에.



나는 본다. 어떤 풍경은 보고 싶어서 보고, 어떤 풍경은 보기 싫지만 본다. 대체로 눈을 감지는 않는다. 눈을 뜨는 것이 나의 일이다.



‘볼거리’가 많은 5년이었다.



이다지도 기상천외하고, 이다지도 야만과 첨단을 오가며, 이다지도 교활과 아둔을 ‘한 화면’에 보여준 정권이 또 있었던가. 정교와 허술, 노출과 은닉, 공익과 사익이 경계를 허물고 뒤섞이는 풍경은 경이로웠다. 치욕을 명예로 알고, 빤스를 센스로 여기는 자들이 활개를 친 5년이었다.



촛불에 대한 사과와 동시에 밀어붙인 광폭한 탄압, 용산참사, 쌍용차 사태, 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 민간인사찰, 디도스 테러, 인권위 사태, 공기업 마구잡이 매각, 방송장악, 자원외교 사기행각, 희망버스 탄압, 4대강 파괴, 강정마을 해군기지 폭력강행, 심지어 국정원 댓글알바단 의혹까지.



전직 대통령이 몸을 던지고, 고통에 신음하는 마을공동체를 보듬던 70대 늙은 사제가 경찰에 떠밀려 7m 포구 아래로 떨어지는 일마저 벌어졌다.



이루 열거하기도 벅찬 사건 사고들이 지난 5년간 벌어진 일이라니, 대통령이란 얼마나 위대한 자리이며, 어찌 이명박을 으뜸이라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가 성취했다고 믿었던 ‘최소한의 민주주의’도 이명박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앞서 열거한 많은 사건들의 현장을 나는 보았다. ‘보는 것’이 곧 나의 일이므로.

‘볼거리’를 끊임없이 제공해준 이명박에게 나는 감사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저주하련다. 당신이 펼쳐놓은 풍경들은 ‘목격자의 의무’를 부채질 하는 것이었다. 목격자로 하여금 부채감에 시달리게 하는 풍경이었다. 생각의 파도가 미칠 듯이 밀려오는 풍경이었다.



졌다. 당신에게는 졌다. 당신 말마따나 당신네 정권은 해보지 않은 일이 무엇인지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도둑적으로 완벽했다. 그러니 가라. 가고 다시 오지 말되, 다른 형식으로 오라.

당신이 ‘보여준’ 것이 무엇이고,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다른 형식’으로 호출된 당신은 말해야만 한다. 우리는 미래를 볼 수 없다. 과거를 보았을 뿐이다. 우리가 본 것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기에, 나는 투표한다.



20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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