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계삼에 관한 것은 아닌 >
1월 23일 저녁, 밀양의 작은 식당에서 이계삼 선생과 밥을 먹었다.
짧지 않은 시간 교단에 섰던 그는, 여전히 교육운동가였지만 교직을 떠난 뒤였다. 대신 ‘밀양 송전탑 반대대책위 사무국장’이라는 낯선 직함을 어딘가에 품고 있었다. 곁에 유동환 씨가 앉았다. 지난겨울 송전탑 문제로 시름에 젖어 음독으로 삶을 등진 일흔네살 유한숙 어르신의 맏아들이었다. 조계사에서 열흘을 머물다 49재를 지내고 내려오는 길이라 했다. ‘장례 없는 49재’였다. 언제 장례를 치를 수 있을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둘은 밥상에서 울 수 없어 웃었으나, 한숨 같은 것이었다. “어쩌다 이 싸움이 ‘효투쟁’이 되어버렸다”는 이계삼의 탄식은, 국가가 대체 누구를 사지로 몰고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5월 24일,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눈물의 광장에서 유동환 씨를 만났다. 보자기로 싼 액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아버지의 영정이었다. 왜 보자기를 풀지 않느…냐고 묻자, “도저히 풀 수가 없다”고 답했다. 지금은 아이들을 애도하는 시간이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10월 23일, 밀양에서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다가 주점 주인에게서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세상은 어찌 이리 스산한가. 이계삼의 고향선배라는 거였다. “형 입장에서 생각하면 제발 그런 일 안하길 바란다”던 그는 “계삼이가 왜 저러는지 알 수 없다가도, 문득문득 고맙다”고 했다. “우리 이계삼 선생 꼭 좀 도와주이소.” 이 말을 열 번 했던가, 스무 번 했던가.
11월 13일, “쌍용차 정리해고가 정당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던 날, 해고노동자들 곁에 있던 이계삼 선생을 만났다. 함께 상경한 할매들은 “할매할배들 다 죽이고, 노동자들 다 죽이고, 느그들끼리 잘 살 줄 아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 메모들은 이계삼에 관한 것도, 밀양에 관한 것만도 아니다. 우리의 세계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연결의 사이에 고마움과 미안함이란, 대체 어떤 의미일까.
–
<씨네21> 2014.11
글과 사진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