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그러더군요. “국가가 벌인 못된 짓들을 시시콜콜 쫓아다니며 욕을 해댄 작업을, 국가가 운영하는 미술관에 번듯하게 전시해놓은 꼬락서니가 말 그대로 모순은 아니냐”고요. 맞는 말입니다. 한 때, 제가 새 수첩을 사면 맨 앞에 써놓곤 했던 문구가 이랬습니다. … “모순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은 그 모순들이 함축하는 것 – 그것들이 무엇을 가능케 하고 무엇을 배제하는가 – 에 대한 실천적 감각을 필요로 한다.” 에비게일 솔로몬 고도우가 했던 이 말이 항상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저는 노순택이 아니라 모순택입니다. 어느 새벽, 까만 양복을 입고 밀려오던 건장한 남자 무리들을 떠올립니다. 늙은 농부들을 몰아내고 그곳에 어마어마한 군사기지를 짓고자 동원된 깡패무리였습니다. 국가는 자신이 직접 손대기 꺼림칙했던 그 일을 용역깡패들에게 맡기더군요. 너른 들녘으로 검은 양복쟁이들이 포클레인을 앞세우며 밀려오는데 늙은 농부들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었을까요. 볏짚을 태우고 연기를 피워 그들의 접근을 잠시라도 막아보겠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그 처절한 풍경을 사진기 뒤에 숨어 지켜보았습니다. 셔터를 꾹꾹 눌러대면서요. 인화지로 뽑아놓고 보니 그 장면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근사했습니다. 사진은 얼마나 저열하게 근사한 것인지요. 용산참사가 벌어지던 1월 20일의 몸서리치게 춥던 새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망루에 불이 붙어 사람이 죽고 있는데, 했던 일이 고작 셔터를 눌러대는 짓이었습니다. 이가 갈리는 장면이었습니다. 헌데 사진으로 뽑고, 미술관에 걸고 보니, “대단한 작품”이라는 겁니다. 사진은 얼마나 초라하게 대단한 것인지요. “국가가 벌인 못된 짓들을 시시콜콜 쫓아다니며 욕을 해댄 작업”을 근사한 벽면에 걸고, 혹은 책으로 옮겨 당신의 눈에 띄도록 한 것이 저의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모순이기도 했고, 모순되게도 미술의 세계에서는 모순이 아니기도 했습니다. 당신에게 그 장면들은 무엇이었습니까. 이런 장면넝마주이로 살 줄 예전엔 몰랐습니다. 앞으로 어디서 허우적댈지, 뭘 줍고 다닐지, 어디서 자빠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실대며 걸어다녔으니, 비실대며 걷겠지요. 세월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의 시신이 하나 둘 인양될 때 정말로 무서워서 팽목항에 가질 못했습니다. TV를 보는 것도, 인터넷을 접속하는 것도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유가족들이 KBS를 항의방문하고, 청와대 앞 길바닥에서 오들오들 떨며 비참한 밤을 새던 그날 처음으로 아이들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엄마 아빠들이 자신과 똑 닮은 아이들의 얼굴을 품에 안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흐르는 무거운 공기를 견딜 수 없어 끊었던 담배를 입에 물었습니다. 어버이 날이었죠, 그날이. 이튿날 안산에 내려가 볼 용기를 냈습니다. 5월 10일, 시민들이 합동분향소를 에워싸고 인간띠잇기를 하며 노란 풍선을 하늘로 띄워 보냈던 날에도 안산에 갔더랬죠. 하늘로 올라가는 노란풍선들을 사진기에 담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한 풍선에 편지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모두가 입 안에 담고 있던 말이 “기억할게, 잊지 않을게”였다는 건 알죠.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고, 특별법을 약속하고, 유가족의 가슴에 한이 맺히지 않게 하겠노라 단호하게 얘기할 때, 이 아픔은 참으로 크지만 그 진상만큼은 밝혀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을 모욕하고 조롱하고 음해하는 짓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철없는 무리들만이 아닙니다. ‘걸어다니는 입법기관’이라는 국회의원들이 그런 짓을 일삼고 있습니다. 유가족들이 지금까지 유일하게 요구해온 “진상규명” 그걸 못하겠다니요. 지금도 국가기관에 의해 증거물들이 감춰지고 삭제되는 마당에 수사권도, 기소권도 없이 어떻게 진상조사를 하라는 것인지요. 용산참사 때도 경찰은 “수사기록을 제출하라”는 법원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법집행! 법집행! 노래를 부르는 자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일에는 초법 탈법 위법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식물조사위로는 사건의 실체에 접근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사실을 밝히는 것이 세월호에서 생을 다한 이들에 대한 산 자의 예의고, 그것이 곧 장례입니다. 우리는 아직 조문객이 되지 못했습니다. 노란 풍선이 편지를 매달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아름답나요? 사실은 추악하죠. 털은 고작 털이지만, 몸에서 비롯되지 않은 털이란 없습니다. 이런 ‘털로 된 거울’을 만들고자 당분간은 거리에 머물 생각입니다.
하루를 보내면서, 이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일까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기억할게, 잊지 않을게”라고 약속해놓고, 피로감을 얘기하잖아요, 우리는.
이를테면 사진은 세상의 털이지요. 몸통은 아닙니다. 하여 털을 보여 드릴 테니, 그 털이 어떤 몸에서 비롯된 것인지 생각해 보시렵니까. 그러면 털에서 거울을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격려와 축하말씀에 일일이 답글 달지 않고, 이 글을 감사의 인사로 갈음할까 합니다.

과분한 격려와 축하에 잠시 멍했습니다.
2014.9.12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