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한 풍경의 젊은 뱀 Sneaky Snakes in Scenes of Incompetence
“우리를 공기처럼 감싸고 있는 것은, 분단만큼이나 사진이다.”
목격자에게 책무가 있다면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기억일 수 있고, 기록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개입일 수도 있다. “그곳에 윤리가 스며든다”고 외치는 이도 있다. 기억과 기록, 하물며 개입도 진술을 필요로 한다. 허나 진술이 진실의 반려자인가. 그들의 관계는 아리송하다, 엇갈린다. 이 엇갈림이야말로 진술의 한계이자 답답함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이 아닐까. 모든 목격자의 진술에는 결함이 있다.
지난 10여 년간 한 일이라곤 싸돌아다니는 것이었다. 바라보는 일이었다. 사진기라는 넝마상자에 이미지를 주워 담는 일이었다. ‘궁금함’이라는 다소 엉뚱한 기준이 있었고, 분단체제는 까면 깔수록 속을 알 수 없는 만화경의 풍경을 펼쳐주었기에 나는 집착했다. 첫 작업 <분단의 향기>에서 시작해 <얄읏한 공> <붉은 틀> <비상국가> <좋은, 살인> <망각기계>에 이르기까지. <어부바>마저도 분단목격담의 일환이었다. 이 작업들을 가로지르는 문장이 무엇일까. 분단은 오작동으로써 작동한다. 작동이 오작동이요, 오작동이 곧 작동인 신기를 보여준다.
나와 사진기가 함께 싸돌아다니며 채집한 장면들이 이번 전시에 담겨 있다. 매향리 미공군폭격장, 여중생 압사사건, 초대형 미군기지확장으로 강제이주 당했던 평택 대추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특별시, 미국산 쇠고기 수입파동, 용산참사, 전임 대통령의 자결, 쌍용차 대량해고사태, 천안함 침몰사건, 연평도 포격사건,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강행, 고압송전탑 문제로 시름하는 밀양, 공공자산 민영화문제, 내란음모 사건, 세월호 참사까지 지난 10여 년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사건과 장소가 이 전시의 밑바탕이다. 잔인한 풍경이었다 말할까. 아니, 잔인하기 전에 ‘무능한 풍경’이었다.
사진이 있다. ‘그때, 그곳’에 사진기와 사진사가 있었다.
재현의 역사에서 사진의 좌표는 독특하다. 기술(技術)로써 기술((記述)을 가능케 한 요상한 기술(奇術)이 사진이다. 젊다. 태어난 지 175년밖에 안되었으나 사진은 시각재현의 역사를 새로 쓸 만큼 유능했다. 이제 사진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다. 교활하다. 사진은 필연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필연적으로 감춘다. ‘그때, 그곳’을 보여주되, 곧이곧대로 보여주는 사진이란 발명된 적도 없다.
사진은 틀 안에 담긴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 사각형 안에는 포착된 대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진기와 사진사의 위치가 암시되어 있다. 그는 누구인가. 이른바 ‘현장’에서, 특히 사회갈등의 현장에서 사진기와 사진가는 어떤 모습으로 동작하는가. 목격자라 불리는 이들의 풍경, 이것은 내 오랜 관심사였다. 때로는 우연히, 때로는 일부러, 나는 나의 분신들을 사진기에 담아왔다.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었다. 사진이 근사할지라도, 그것을 담는 과정마저 근사한 것은 아니니까. 가끔은 추했다 말하는 것이 솔직하리라. 허나 추악함이야말로 나를 구성하는 성분이 아니던가. 나를 대면하는 일, 더구나 나 아닌 다른 사진가를 바라봄으로써 내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일은 오만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사진은 찰칵대고 또 찰칵댄다.
젊은 뱀처럼 유능하며 교활하다. 허나 그것이 무능의 반대말이란 말인가.
사진은 겉을 다룬다. 겉만 다룬다. 안을 생각함, 그것은 사진의 몫이 아니다. 누구의 몫일까.
나는 찍는다, 고로 찍는다.
* 장소 : 국립현대미술관 본관(과천)
* 기간 : 2014.8.5 – 11.9
조금 전 우연히 수상 소식을 들었습니다. 평소 예술상 당선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기쁘네요.
이번에는 예상이 적중해서 기뻤는지도 모릅니다만 어쨌건 축하합니다. 기쁘시겠네요.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