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십이월의 첫 주, 쪽지가 날아왔다. 후배였다. 웬일로 겸손한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부탁의 건이었다. 돌 사진을 찍어달라는 얘기였다. 난데없는 요청에 경험도 전무하므로 단박에 거절해야 하리라. 하지만 못했다. 최종범의 아기, 1년 전 그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게 했다던 존재, 최별의 돌잔치라는 거였다. 후배는 기특하고도 영악하게 우리집 늦둥이의 안부를 물었다. 고로 내가 적임자라는 얘기였다. 2013년 12월 13일과 15일에 나는 첫 돌을 맞은 두 강아지의 사진을 찍었다. 최별은 붓을, 노은은 연필을 쥐었다. 3. 두 물음이 사무친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무엇이 “새로운 삶”을 약속했던 아빠 최종범을 벼랑으로 민 것일까. 우리의 강아지들이 각자의 붓과 연필로 그리고 적어야 할 세상이 이토록 무겁고 무서운 것이라면, 축복이란 얼마나 공허한가. 안녕할 리 없다, 이대로라면. 안녕하지 못한 어른들이 건네는 ‘안녕!’은 마치 삼성의 ‘가족!’이 내뱉는 헛된 인사처럼 씁쓸하다. 실은 기만적이다.
사진의 털 #125 ———– 어느새 성탄 이브로군요. 저는 비록 예수를 믿고 따르지 아니하나, 세상의 가난하고 고단한 이들을 예수로 섬기며 낮은 곳으로 향해 온 참된 성직자들의 존재만큼은 믿습니다. 대추리에서, 용산에서, 강정에서, 밀양에서, 쌍용차 공장 앞에서 숱하게 그 분들을 보았습니다. 별이의 돌잔치를 ‘아빠인듯’ 마련해 주신 이들도 그 분들이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야말로 정치를 올곧게 세우는 데 동참해야 할 의무를 진다”는 새 교황님의 말씀은 얼마나 근사한가요. 세상의 모든 강아지들이 복에 겨운 성탄이기를!
1. 시월의 마지막 날, 한 노동자가 세상을 버렸다.
“배고프고, 힘들었다.” 그가 남긴 말이었다. 시월의 마지막 날은 1963년이 아닌, 그렇다고 1983년도 아닌, 2013년 시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의 일터는 영세공장이 아닌, 부도직전의 쓰러져가는 회사도 아닌, 굴지의 글로벌 기업 어쩌다가 우리에게 ‘또 하나의 가족’이 되어버린 수퍼자본 ‘삼성’이었다.
…
노동자 최종범의 죽음은 오늘의 노동이 어떤 지경인지를 증언함과 동시에, 오늘의 자본이 어떤 경지에 올라있는지를 증언한다. 최종범의 가슴에 수놓인 ‘삼성’은 거짓이었다. 그는 이른바 하도급 노동자였다. 삼성은 다를 거라는 환상은 어떤 면에서 착각이었으나, 어떤 면에선 현실이었다. 삼성은 다르지 않았고, 허나 확실히 달랐다.
<씨네21> 2013.12
예수님도 한 때는 귀여운 강아지였겠지요….

몇일전 한겨레 신문에서 ‘돌쟁이 딸의 배웅’이라는 제목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안녕하지 못한 세상에 아내와 딸을 두고 떠나야 하는 최종범씨의 마지막 가는 길에도 차마 안녕이라는 인삿말을 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여전히 비정상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세상…
세상은 한동안 겨울공화국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