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뢰가 과로할 때
나도 안다. 무식이라는 몸뚱이에 상식이라는 팬티만 입혀 말하면, 주한미군이 전쟁억지에 지대하고 혁혁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나도 안다. 반세기 전 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참화 속에서 3만 명이 넘는 미군이 귀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그들의 희생과 그들의 원조가 잿더미 위의 기적을 이루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그 사실을.
나도 안다. 호시탐탐 남침야욕을 불태우는 저 붉은 괴뢰도당이 미군의 최첨단 스텔스 전투기와 페트리어트 미사일을 얼마나 두려워하며 부러워하는지, 그 때문에 얼마나 과로하는지.
누구나 알 것이다. 외침에 시달려 온 우리역사와 오늘날의 정치외교적 상황을 돌아보면, 주변 강대국들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강한 친구를 요청하게 된다는 강박적 현실을. 게다가 그 친구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전도사가 아닌가.
미국은 어찌하여 이리도 고귀할까. 세계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사랑의 전쟁을 실천해온 친구, 피를 두려워않고 오히려 피를 향해 주저 없이 달려온 혈맹! 고마운 일이다, 그것이 인류애라면.
그러므로 ‘실수’라고 말하자. 선의를 가진 이들도 얼마든 실수할 수 있는 법이고, 그들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실수를 어쩔 수 없이 자백할 때가 잦았으니까. 그들은 실수가 많았다. 일제강점에서 겨우 벗어났다 싶었는데, 그 하수인들이 다시 강점하는 세상을 만들어 준 것이 그들의 결정적 실수였다. 혹은 의도된 실수였다. 덕분에 행정공백은 줄었다. 모름지기 해방은 전면적인 공백 속에 새로운 행정을 수립하는 것이어야 했는데, 미국에게 필요한 건 말 잘 듣는 행정이지 어설프거나 까탈스런 행정이 아니었다. 친일파가 친미파로 변신한 건 삽시간이었다. 그로써 어떻게 각자의 정부가 수립되고, 38선이 그어지며, 전쟁이 터지고, 저마다의 정치가 독재로 치달았는지, 그 과정에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는 반세기의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 했겠지만, 한 짓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억압자들을 수호한 것이었다. 1980년 광주의 피울음은 남한 사회에서 미국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전면적으로 묻는 계기였다. 군사작전통제권을 가진 미국은 신군부의 동향과 ‘화려한 살육’작전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살육을 지시하지 않았으나, 묵인으로 승인했다. 전두환을 비호했다.
5.18 국립묘역 추모관에 ‘한미동맹의 3가지 이점’을 알리는 홍보물이 들어섰다는 뉴스가 흐른다. 보훈처는 “5·18도, 한미동맹도 ‘파트’는 다르지만 모두 애국”이라 역설했단다.
제 정신일까. 한미동맹이 밝다 해도, 그곳은 한미동맹의 그림자를 사죄해야 하는 공간.
묻자. 미국과 소련은 인류애를 실천하기 위해 한반도에 왔는가, 그들의 필요에 의해 왔는가. 괴뢰의 속성은 과로다. 적당히 괴뢰하지 않고, 지나치게 괴뢰한다. 똥도 된장이라 선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