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멸해 갈 수밖에 없는, 소중한, 특정부위
사진은, 그 시작부터 찬양과 저주를 한 몸에 받았다.
그 저주받은 숭배, 혹은 찬사받은 저주는 1839년 프랑스 학사원에서 사진술이 공표됨과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
사진은 인간의 ‘손’을 무력감에 떨게 했다. 아무리 정교한 손도 사진의 묘사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정확한 재현이 회화에 부여된 중요한 책무 가운데 하나였던 시대에 사진술은 회화를 한껏 비웃는 혁명이자 마법이었다. 아울러 공포였다. 당대의 역사화가 폴 들라로슈가 “오늘로 회화는 죽었다”고 탄식했던 건 괜한 걱정이 아니었다. 사진은 환영받았다. 자신이나 가족의 초상을 소유하는 행위가 곧 계급의 반영이던 시대에 사진술은 회화와 비교할 수 없는 저렴한 금액으로 빠르고 쉽게 이미지의 독점을 와해시켰다. 군중도 귀족을 흉내 낼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사진술은 똑같은 이유로 비난 받았다. 그것은 손을 무력감에 떨게 했지만, 인간의 손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기계에 손을 빌려준 짓에 불과했다. 손은 인간정신의 반영일진대, 기계 따위에 얹혀가는 손이라니, 그 따위가 무엇이란 말인가. 혹여 예술?
사진이 예술가 집단에게 빠르게 수용됨과 동시에 가장 격렬한 거부에 직면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였던 샤를 보들레르는 사진을 “산업적 광기”라 부르며 그것이 예술을 넘보려는 시도에 독설을 뱉었다. “사진이 자신의 동맹군이라 할 어리석은 대중의 힘을 빌려 예술의 자리를 차지하고, 결국 예술을 망칠 것”이라 경고했다. 그에게 사진은 “언감생심 예술을 넘볼 게 아니라, 예술과 과학의 겸손한 시녀”로 돌아가야만 하는, 주제파악이 필요한 도구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사진은 “기억의 아카이브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시간의 희생물들, 사멸해 갈 수밖에 없는 모든 소중한 것들, 망각 속으로 부서져 가는 모든 폐허들, 책들, 판각들, 원고들을 보존케 하는” 역사의 비서가 될 것이었다.
그랬던 그도 카메라 앞에 다소곳이 앉아 렌즈를 응시했으니, 우리는 그를 “시간의 희생물”이라 불러야 할까, “사멸해 간 소중한 것”이라 불러야 할까. 아무튼 보들레르는 보존되었다. 시녀에 의해 보존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나를 바라보는 보들레르’와 시간을 넘어 눈맞춤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진술은 예술을 간 보고, 깔보고, 심지어 예술 자신이 되었다. 회화를 변질시킴으로써, 새로운 회화사를 쓰게 했다. 과학과 산업과 예술의 경계를 무디게 했다. 이제 사진 없는 현대미술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으니, 이로써 예술을 망친 셈인가.
이 여름, 사진은 다른 측면의 저주에 직면한다. 해마다 이맘이면 해변에서 “사멸해 갈 수밖에 없는 모든 소중한” 이른바 ‘특정부위’를 카메라에 보존하려다 범법자가 된 이들의 뉴스가 흘러나온다. 사진은 여전히, 보존하는 동시에 망친다. 그리하여 지금은, 사진이 사람을 망치는 복잡한 사례가 아카이브되는, 수상한 사진의 시대.
2012.8
씨네21 www.cine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