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동강사진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최광호, 이상일, 이갑철, 성남훈, 오형근 등 든든한 선배들이 받았던 상을 제가 받으니, 과분한 일이지요.
수상자 개인전 타이틀은 <실성한 성실>입니다. 제가 그동안 진행해 온 작업 중 <얄읏한 공> <붉은 틀> <좋은, 살인> 등 세 개의 시리즈 60여점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10월 1일까지니, 혹 영월에 가실 일이 있거든 들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래는 제 전시에 관한 <기획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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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이라는 현기증
전시기획_엄상빈(동강사진상 운영위원)
노순택이 그동안 진행해 온 작업은 ‘분단의 현재성’에 관한 것이었다.
분단이라는, 우리의 일상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사실은 우리의 일상과 얼마나 가까운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 사회와 개인의 삶이 어떻게 왜곡되는지를 관찰하고, 수집하고, 제시해 왔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전쟁과 분단을 역사의 장에 편입시킨 채 시시때때로 아전인수식 해석잔치를 벌이는 분단권력의 빈틈을 째려보는 일”이라고 밝힌다. 그에게 분단권력은 “남북한에서 작동하는 동시에 오작동하는 현실의 괴물”이다. ‘빈틈’이라니. 빈틈이란 과연 어느 시공간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그 빈틈을 통해 바라본 ‘괴물’은 어떤 모습일까.
노순택이 지금까지 토해 놓은 일련의 분단 시리즈는 <분단의 향기>를 시작으로 <애국의 길> <얄읏한 공> <붉은 틀> <블랙후크다운> <좋은, 살인> <비상국가> <가면의 천안함> <배후설 ; 메가바이트산성의 비밀> <잃어버린 보온병을 찾아서> <망각기계> 등 만화경과도 같다. 기괴하게 뒤틀린 분단의 어지러움이다.
그 가운데 <얄읏한 공>과 <좋은, 살인> <붉은 틀>을 동강사진상의 수상전시로 엮은 까닭은 이 작업들이 노순택의 분단관찰법을 들여다보는 좋은 통로이기 때문이다. 그는 명확한 무엇을 보여주지만, 자신이 드러내려던 무엇인가는 슬쩍 감춘다.
우선 <얄읏한 공> 시리즈는 주한미군기지 확장사업으로 강제이주해야 할 처지에 놓인 평택 대추리란 마을에 작가가 거주하면서 진행했던 작업이다. 그는 ‘레이돔’이라 불리는 미군의 첨단 레이터 시스템의 정체를 추적하기 위해 쉬운 방법으로 가지 않고 애매한 길을 택한다. 주민을 인터뷰하고, 답장을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주한미군사령부에 질의서를 발송하고, ‘네이버 지식인’에 지식을 구걸한다. 그런 단편들을 모아들고 군사전문가의 자문을 듣고, 구조물의 설계와 재질 및 용도가 기술된 무기산업체의 홈페이지를 들락거린다. 그러면서 미국의 전세계 감청망인 ‘에셜론 프로젝트’와 한반도를 언급한다. 상승하던 이야기구조는 대추리 농민의 자잘한 이야기로 급격히 선회하면서 추락한다. 공은 대체 무엇이었던 걸까. 레이돔은 주위 풍경과 묘하게 어울리며 스스로의 존재를 은폐 또는 부각시킨다. 긴 작업노트와 100여 점의 이미지로 구성된 <얄읏한 공> 시리즈는 분단사회의 갈등이 얼마나 비극적이며 동시에 희극적인가를 함께 보여준다.
<좋은, 살인>은 최첨단 무기의 살상능력에 대해 ‘사고’했다는 이유로, 4년을 키워온 파일럿의 꿈을 강제로 접어야만 했던, 어느 공군사관생도에게 헌정하는 작업이다. 노순택은 첨단과학의 집결체인 무기산업이 어떻게 의심을 금지시키는지 보고자 했다. 그는 전세계 ‘무기쇼 스케줄’을 수집하는 동시에, 남한사회에서 ‘무기 비즈니스’가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는가를 탐색했다. 단적으로 그가 생산한 이미지들은 서울을 비롯해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아우르는 남한 전역에서 수집된 것이다.
<붉은 틀> 연작은 전적으로 북한에 관한 작업이다. 하지만 전적으로 남한에 관한 작업이기도 하다. 이 작업은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북한은 북한 스스로를 어떻게 재현하고 있는가, 둘째 남과 북이 만날 때 어떤 해프닝이 벌어지는가, 셋째 남한사회에서 북한은 어떻게 재현되어 왔는가. 남과 북은 1950년의 전쟁이후 분단체제라고 하는 비정상적인 정치·사회시스템을 60여년간 운용해 왔다. 이는 서로의 체제를 극단적으로 저주하는 동시에, 그 작동방식에서 닮음을 추구하는 식으로 이어져 왔다는 것이 노순택의 생각이었다. 그가 보기에 남북의 독재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요청해야만 하는 사이였다. 남북의 시민/인민들은 끊임없는 동원에 시달리며 한편으론 감각의 날을 세우고, 한편으론 감각기관에 마취제를 맞아야 했다.
‘분단인’의 삶이란, 불려 다니는 삶이다. 자신의 정체를 감추면서도, 체제가 요구할 때마다 증명해야만 하는 삶이다.
노순택은 기발표되었던 <붉은 틀>을 종료시키지 않은 채, 그에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이라는 가장 가까운 시점에 발생한 분단사건을 덧붙임으로써, 우리의 오늘을 묻고 있다. 오늘, 우리는 안전한가. 안전이란 무엇인가. 분단체제에서 안전은 어떻게 공포와 냉소의 인질이 되는가. 분단은, 어지러움을 불러오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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