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는 냉수인가
많은 사진가들이, 죽음을 노린다.
사진의 길지도 짧지도 않은 역사 속에 ‘죽는 순간’은 얼마나 많이 포착되었던가. 20세기 사진의 정점에 저널리즘이 있다면, 그 저널리즘의 정점에는 언제나 죽음이 있었다.
타인의 삶에 눈곱만큼의 관심조차 없던 이들도, 타인의 죽음, 그 죽음의 장면에는 눈길을 보낸다. 죽음이란 얼마나 훔쳐보고 싶은 것이며, 살아있는 자 모두의 애끓는 관심사인가. 저널리즘은 험악한 죽음의 현장 속에 우리를 몰아넣지 않으면서도, 그 죽음의 절정을 안전하게 엿볼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해 주었다.
저널리즘의 쳇바퀴 안에서, 죽음은 소비된다. 하지만 차갑게 비웃지만은 말자. 냉소가 냉수일 수는 없으니까. 저널리즘이 폭로하고 증언했던 숱한 죽음의 장면들이, 그 죽음의 이유를 생각게 하고, 또 다른 죽음을 막도록 우리를 움직였으며, 나아가 우리 자신에게 죽음의 평범함, 죽음 앞에 예외는 없다는 그 평등함에 대해 은밀하게 속삭여 온 것도 사실이니까.
많은 사진가들이 죽음을 노린다지만, 때로는 죽음이 사진가를 겨냥한다. 사진의 증언능력을 겨냥하고 발생하는 죽음, 사진에 기댄 죽음, 사진기 앞에서 호소하려는 죽음 앞에서, 사진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지난 3월 26일, 인도 뉴델리에서 한 남자가 자신의 몸에 불을 댕겼다. 잠펠 예시, 스물일곱살의 티벳 망명자였다. 그는 후진타오의 인도방문을 앞두고 고국 티벳의 자유와 해방을 호소하기 위해, 군중이 모인 자리에서, 사진기가 눈알을 번뜩이고 있던 그 자리에서 분신했다.
몸에 불을 짊어진 한 남자가 달려가며 외치는 그 장면은, 세계로 타전되었다. 우리는 잠펠 예시의 죽음이 담긴 사진을 통해, 잠펠 예시를 보았다. 우리가 본 것은 사진이자, 잠펠 예시다.
소설가 공지영은 트윗에 이렇게 썼다. “불을 꺼야지 사진을 찍고 있네, 이 나쁜.” 그녀의 트윗에 나쁜 사진이 첨부되었다. 많은 이들이 동의의 리트윗을 보냈다. “저런, 쯧쯧…. T.T”, “어캐 해봐요. ㅠㅠ 안타깝네요.”
반론도 있었다. “그럼 티벳에 가셔야지 왜 트윗이나 하고 계십니까, 이 나쁜”, “알려야 하니까요. 그 처절함을. 간절함을.”
누가 옳은 걸까. 공지영이, 나쁘다 말했던 그 사진을 트윗에 첨부한 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그날, 뉴델리의 거리에서 요청됐던 사진가의 윤리는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죽음과 그 이유를 증언해 달라는 잠펠 예시의 호소를 전파하는 것이었을까, 눈앞의 불을 끄는 것이었을까.
직업병인가. 나는 잠펠 예시와 그 앞의 사진기, 그 뒤의 사진가, 셋에 대해 함께 생각한다. 사진은 대상의존적이다. 도가니가 지나간 뒤라도 소설은 도가니를 쓸 수 있지만, 잠펠 예시가 지나간 뒤에 사진은 잠펠 예시를 찍을 수 없다. 옳고 그름은 없다. 그것은 각자의 매체가 지닌 본성이므로. 소설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과 사진으로 당장을 마주한다는 것, 둘 다 미친 짓.
누구 말마따나 자신의 기분 만족을 위해 이런 일을 하기는 어렵다. 죽음을 대하는 일은 계속하기가 어려운 직업이다.
그나저나 중국에게 묻는다. 당신들이 티벳에 하는 짓, 사회주의적인가.
2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