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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큼 쉬운 것도, 어려운 것도 없다네

종이매체와 온라인매체에서 ‘제목뽑기’는 참 다르다.

두 매체 모두에서 제목은, 기사내용의 집약일 뿐만 아니라 미끼로써 기능한다.

하지만, 그 정도가 다르다.

종이매체에서 제목이 ‘간판’의 역할에 좀 더 충실하다면, 온라인매체에서 제목은 ‘미끼’의 역할에 더 충실하려고 하는 것 같다. “온라인 기사는 제목 장사가 반이상”이라는 자조섞인 푸념은 정확하게 매체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제목을 둘러싼 글쓴이와 편집부의 보이지 않는 갈등도 온라인매체에서 더 심하지 않을까.

나는 겨우겨우, 간신히 글을 쓰는 편이라, 제목을 뽑을 때도 신경이 곤두선다. 
쉽사리 제목을 잡는 경우도 있지만, 어렵게 어렵게, 때론 가까스로 제목을 잡는 경우도 있다. 

지난 3년동안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는 <씨네21>의 경우 내가 뽑아 보낸 제목이 수정된 경우가 지금까지 단 한 차례였다. 나를 존중해서만이 아니라, 내가 뽑은 제목이 그럴만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하지만, 온라인매체에 송고한 경우, 제목이 그대로 반영된 경우가 거의 없었다.

늘 더 선정적이었다. 잘 뽑은 제목이라고 인정해 줄만한 것도 여럿이었지만, 일단 ‘모니터’에서 더 눈에 띄게, 마우스 클릭을 ‘유인’하는데 방점이 찍힌 제목이 대부분이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은, 온라인 제목뽑기에서 ‘글에 금칠을 해놔도, (제목을) 클릭해야 기사’라는 현실이 되니까.

이럴 때 필자는 편집부에 감사해야 할까, 분노해야 할까.

어제 오마이뉴스에 송고했던 글의 ‘바뀐 제목’이 하루 종일 나를 따라 다녔다. 자꾸 떠올랐다. 엄밀하게 말해 틀린 제목은 아니었다. 틀린 제목은 아니었지만, 옳은 제목도 아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제목 덕분(아마도 그럴 것이다)에 그 글은 4만명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나는 많은 이들이 그 글을 읽기를 원했다. ‘희망버스의 이유’와, 그 ‘기록의 이유’를 말해야 했고, 또한 요청을 받기도 했고, <희망버스> 기획팀의 바닥난 재정에 우리가 힘겹게 만든 책 <사람을 보라>가 도움이 되어주길 바랐다.

그 글을 읽은 숱한 이들이, 제목만 본 게 아니라면, 글을 모두 읽어내려갔다면, 내가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 알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제목은 나를 편치 않게 한다. 내가 쓴 글의 내용에서 뽑아낸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그 제목은 글의 얼굴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보냈던 제목에도 나는 확신하지 못했다. 제목이 잘 안뽑아지는 글이었다. 여러 제목을 뽑아 보았다가,

사람사진만큼 쉬운 게 없고
사람사진만큼 힘든 게 없네

– 우리가 <사람을 보라>를 펴낸 이유

로 잡았는데, 다시 보아도 이건 또 아닌 것 같아

조남호의 ‘희망’과 김진숙의 ‘절망’이 마주할 때
우리는 무엇을 보았나, <사람을 보라>를 펴낸 이유

로 수정했다. 하지만…. 결국 제목은 편집부를 거치면서 ‘김진숙과 전태일의 유서, 같지 않기를!‘이 되고 말았다. T.T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17153&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9

아휴…. 잊어야지…. 나는 왜 이렇게 사소한 것을 사수하려 부르스를 치는 것일까….
어쩐지 불쌍해진 내 글에, 여기서라도 첫 제목을 달아 주어야 할 것 같다.

——————-

사람사진만큼 쉬운 게 없고
사람사진만큼 힘든 게 없네

– 우리가 <사람을 보라>를 펴낸 이유



누구나 사진기를 들고 다니는 세상에, 우리는 산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저마다는 저마다의 사진기로 세상을 보는 방법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이제 사진기는 사진기에만 붙어있는 게 아니라, 전화기에도 노트북에도 심지어 장난감이나 자동차에도 붙어있다.

하루에 사진 찍는 횟수가 밥숟가락 뜨는 횟수보다 많아진 세상에, 우리는 산다.
현대사회는, 적어도 한국사회는 사진범람공화국이라 불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보려는 것일까, 무엇을 재현하려는 것일까, 어떤 장면을 나누려는 것일까. 도대체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본다는 것은, 보여지는 것에 대한 생각을 유발한다.
재현은, 재현되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요구한다.

사진은, 오만가지 기능을 품고 세상을 활보하지만, 그 가운데 한 가지는 ‘목격의 전달기능’이다. 목격자에겐 증언의 욕망이 의무처럼 뒤따른다.


의문이 경이로움이 될 때

희망버스라는 듣도 보도 못한 계획에 참여해 달라는 시인 송경동의 애절하고 집요한 꾐에 빠진 사진가 예닐곱이 한중중공업 담을 넘을 때만해도 그것은 하나의 의문이었다. 의문이 그렇게 쉽게 경이로움으로 바뀔 줄 아무도 몰랐다. 그 날의 새벽은,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되었는지, 우리가 정말 이렇게 살아도 좋은지를 저마다에게 묻는 동시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케 한 시간이었다. 연대였다. 우리가 잃어버렸고, 결국 되찾아야 할 것은, 눈물의 연대였다. 눈물과 땀이 뒤섞인 소금의 연대였다.

그러므로 “다시 와 달라”는 해고노동자들의 호소에 “가는 듯 돌아오겠다”고 응답한 건 희망버스 기획자들이 아니라 평범한 탑승자들이었다. “이 버스는 재가동되어야 한다”고, “이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저 소금꽃들이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저마다 아우성쳤다. 의문이 경이로움이 되는, 그런 장면 앞에서 사진기들이 작동한 건 당연하다.

약속대로 2차 희망버스가 재가동되었을 때, 더 많은 사진가들이 버스에 올랐다.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졌다. 부산역에서 시작된 평화행진이 폭우를 뚫고 영도에 닿았을 때, 탑승객들을 맞이한 건 한진노동자들이 아니라 거대한 물대포 장벽이었다. 물대포와 최루액이 쏟아지는 봉쇄와 저항의 장면들이 고스란히 사진기에 담겼다.

3차 희망버스는 조선소 앞 산복도로 골목골목을 헤매는, 봉쇄의 빈틈을 찾아 걷고 또 걷는 산행이었다. 왜소했던 희망버스가 거대한 물결이 되어가는 사이, 경찰에게도 응원군이 생겼다. ‘친북좌파 척결과 어르신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성난 눈을 부릅뜬 이른바 ‘어버이’들께서 주먹을 휘두르며 버스로 골목으로 난입했다. ‘절망버스는 꺼지라’는 관변단체들의 현수막도 곳곳에 나부꼈다. 어느새 희망버스는 한국사회를 가로지르는 뜨거운 버스가 되어 있었다. 놓칠 수 없는 장면들, 기억해야 할 장면들 앞에서 각자의 사진기는 쉼 없이 찰칵댔다.

그랬던 그 버스에, ‘4대강 3종세트’(사진집, 시집, 에세이)를 기획했던 아카이브 출판사 박지홍 주간이 탑승하고 있었다. 사진가들과 박 주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금 당장의 연대’를 ‘사진으로’ 해보자는 데 뜻을 모았다.

처음에 뜻을 모았던 소수의 사진가만이 아니라, 희망버스를 목격하고 기록했던 더 많은 사진가들의 참여가 필요했다. 매체 소속 여부, 나이와 경력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목격한 자의 책임이 이 긴급한 사진집 한 권으로 땡처리 될 수 있는 건 아닐지라도, 희망버스에 몇 모금의 윤활유를 넣을 수는 있을 거라는 점에 모두가 긍정했다.

참으로 긴급하게, 하지만 밀도 있게, 그러므로 몇날 며칠을 새며, 따끈따끈한 사진집 한 권을 만들어 냈다.




<사람을 보라> 앞표지와 뒤표지

무엇을 보는가, 사람을 본다

용산을 되돌아본다.
“여기 사람이 있다”는 절규를 들을 줄 몰라서, 생사람 여섯이 망루에서 타 죽었다. 살려고 올라간 사람들이 죽어서 내려왔다.

한진을 되돌아본다.
벌써 몇 명이 그곳에 영혼을 묻었는가.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의 슬픈 이름들이 저 거대한 크레인에 보이지 않게 새겨있다. 한진중공업 조남호 회장은, 그들의 얼굴조차 모른다고 뻔뻔하게 말했다. 하지만 85호 크레인에서 233일째 외롭게 싸우고 있는 김진숙을, 조 회장은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을 것이다.

살려고 올라간 김진숙이 죽어 내려온다면, 조남호는 지금껏 그래왔듯 쉽사리 그녀를 잊겠지만, 더 이상은 안된다. 지금은, 망각기계가 되어버린 조 회장 당신이 치료받아야 할 시간이다. 온 몸을 던져 싸워온 김진숙이 살아 내려와 지친 몸을 달래야 할 시간이다. ‘전태일과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를 ‘김진숙의 유서마저 같은 나라’로 만들어 버린다면, 우리는 희망이라는 언어를 버려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이 사진집의 제목은 <사람을 보라>다.
처음엔 제목 아래 “남이 괴로운데 나는 아무렇지 않다면, 옆에서 누군가 고통의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내 귀에는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는 것, 그것이 사람이다”라는 문구를 넣었으나, 최종작업에서 뺐다. 왜 그랬을까, 책을 읽다보면 알 수 있다.

33x25cm의 커다란 판형에 124쪽 분량이다. 사진만 빼곡한 건 아니다. 본문에 실린 <이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다>는 시인 송경동이 쓴 ‘희망을 절규하는 이유’다. <전태일과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와 <끝나지 않은 기다림>은 소금꽃 김진숙이 쓴 ‘우리 자신의 추모사’다. 뒤편에는 참여사진가 23명의 짧은 후기도 담겨있다.

인세와 수익은 바닥난 희망버스의 연료를 채우는데 사용될 예정이다.
오는 27일 4차 희망버스가 가동되는 서울의 거리에서 기름을 넣어줄 수도 있고, 아래에 링크된 주소를 통해 온라인에서 기름을 넣어 줄 수도 있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624140
http://www.yes24.com/24/goods/5589575?scode=032&OzSrank=9

이 책은 우리의 시각적 목격담이다.
우리가 목격담을 나누는 이유는, 이런 목격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사회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사람사진만큼 쉬운 게 없고, 사람사진만큼 어려운 게 없다는 걸, 우리는 절감한다.


 




펴낸 곳 | 도서출판 아카이브
사진 | 권우성 김수진 김홍지 김흥구 노순택 류우종 박민혁 박승화 박정훈 양태훈 오은진 유성호 이명익 이미지 이재원 이정선 이치열 임태훈 정기훈 정택용 조재무 최형락 한금선
글 | 김진숙 송경동 공선옥 외
편집 | 박지홍 박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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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1. 곽명우 says:
    2011년 8월 28일 at 4:58 오전

    수고 많이 했어요.

     Reply
  2. 최윤정 says:
    2011년 8월 28일 at 3:40 오후

    힘내라 힘!!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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