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향기>, <얄읏한 공>, <붉은 틀> 등의 작업에서 노순택은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각종 사회문제들을 들추어내는 데 힘써왔다. 거기에는 분단의 비애와 고통, 전쟁의 상흔, 이념의 편향성에서 비롯된 인간의 축소, 권력과 감시, 통제와 억압 등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한국사회의 다양한 부정성이 잘 나타나 있다. 수위를 달리하여 우리 시대를 탈 이념의 시대로 규정하는 수많은 목소리에 맞서 작가는 당당하고도 끈질기게 여전히 우리 시대는 이념의 차이가 가장 중요한 갈등을 빚어낸다고 항변한다. 이념의 퇴조는 관념적인 논의 속에서나 있는 것이지 우리 사회의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사진작업을 통해 힘주어 강조하는 문제가 근현대사의 특수성과 맞물린 이념 갈등이나 반민주적인 정부권력, 그러한 권력이 작동하여 빚어내는 억압과 통제와 같은 단편적인 사안들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가 집요하게 수행하고 있는 작업은 근원적인 폭력이 발생하는 지점과 그 폭력이 작동하여 우리 사회를 끝없이 동물성과 야만의 상태로 몰아가는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한 폭력은 분단과 전쟁, 억압과 저항처럼 물리적인 형태로 드러날 때 쉽게 간파할 수 있는 것이지만, 작가는 예리한 눈과 민감한 감수성을 가지고 일상의 곳곳에 스며있는 사소한 폭력의 장치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사소하더라도 그것이 폭력의 씨앗이라면 언젠가는 피어나 삶의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미세하고 잘 드러나지 않는 사소한 폭력의 냄새를 맡아 그것을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내 보여주는 시도가 <똥물도감>, <조류도감>, <국기사용법>, <면죄부>와 같은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작업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작가는 현상들을 전통적인 다큐멘터리 사진의 방법론을 활용하여 단편적으로 포착해내는 데서 그치지는 않는다. 현실의 모습은 그것이 하나의 현상으로 드러나기까지 복잡한 인과관계를 거친다. 현상의 배후에 숨어있는 그 구조를 밝혀내고 참뜻을 읽어내기에 카메라는 무기력하기 그지없다. 카메라는 단지 기록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제대로 읽어내는 것은 고스란히 사진가의 몫으로 남는다. 이를 위해 노순택은 다양한 방법론을 끌어들인다. 일반적으로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오던 상징과 은유를 활용하고, 피사체의 선택과 배제를 적절히 혼합하기도 하며, 텍스트를 사진과 병치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사진은 복합적인 의미 구조를 새롭게 부여받는다.
인간이라는 동물과 동물의 삶
<똥물도감>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주목하여 동물이 인간 세계에서 살아가는, 혹은 인간이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한 때 동물이었던 인간, 혹은 지금도 동물인 인간은 동물성을 떨쳐내면서 야만과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폭력을 저지르고 인간의 사회는 야만성에 물들어 있다. 인간은 동물성을 야만이라 부르지만 정작 야만은 인간만의 것이다. 이는 인간이 여전히 동물성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까닭인가, 혹은 동물성에서 벗어나버렸기 때문인가. 아마도 인간은 한 때 동물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동시에 동물이기를 부정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동물과 유사하면서도 다를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기묘한 동물적 지위를 규정한다. 이 이상한 이중적 지위로 인해 인간은 동물의 삶을 살면서 동시에 동물의 삶에서 멀리 있기도 하다. 작가가 동물의 모습에서 인간의 냄새를 맡고 인간의 삶에서 동물의 체취를 감지해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간의 야만성은 아마도 동물적 본성에서 온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야생 상태의 동물이 지닌 생존본능을 생각하면 그렇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을 모른다. 인간의 편에서 본 동물과 동물의 편에서 본 동물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성에서 벗어남으로써 비로소 인간의 품성을 찾아나갈 수 있었겠지만 그 차이 역시 인간이 규정한 것이다. 그 또한 인식의 폭력 아닌가.
밝은 하늘을 뒤로 한 채 난데없이 눈앞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동물, “누구냐, 넌”이라 외치는 작가의 외마디 비명 속에는 놀람과 두려움이 뒤섞여있다. 역광 때문에 정체를 분간하기 힘든 이 낯선 동물은 인간과 동물의 원초적인 관계에 대한 극명한 상징으로 보인다. 인간의 필요에 따라 인간의 삶 속에 끌려 들어온 동물과 이를 강제한 인간, 이질적인 두 종(種)의 만남은 본래 그런 식으로밖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목이 긴 이 동물 또한 작가 앞에서 똑같이 “누구냐, 넌”이라 외쳤을지도 모른다. 낯설고 이질적인 정체불명의 존재 앞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반응은 원초적인 두려움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질감에서 오는 낯섦과 두려움은 인간과의 관계가 차단된 야생 상태의 동물에게서 쉽게 느낄 수 있지만 인간의 곁에서 사는 동물 또한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늑대를 닮은” 개도 있고, 늑대의 눈으로 매섭게 노려보는 야성을 간직한 개도 있다. 때로는 야성을 잃고 안방에서 함께 사는 애완용 개조차도 낯선 인간 앞에서는 본능적인 적개심을 드러낸다. “당돌한 놈”에서는 한 뼘 키밖에 되지 않는 인형 같은 귀여운 강아지가 태연자약하게 작가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오래 함께 살아 반은 인성을, 반은 야성을 지닌 이 동물이야말로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인지도 모르겠다. 반드시 그래서가 아닐지라도 동물에게는 인간의 모습도 있다. <똥물도감>을 보면 인간과 동물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밥그릇을 비우고도 아직 부족한 듯 혀를 날름거리는 <식충이>의 개는 “배고픈 놈은 잘 먹는” 인간의 모습과 똑같다. 거대한 혀로 얼굴을 뒤덮을 만큼 쩝쩝거리며 품위를 잃어버리는 경우는 배고픈 인간에게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인간의 곁에 살며 인간을 닮아가는 동물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열세 살의 노령에도 꼿꼿함을 잃지 않고 계신” “만득씨”는 사람처럼 옷을 입고 사람처럼 늙어간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본래 가깝고도 먼 친화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양이 탈을 쓴 우리 집 너구리”가 그렇듯 아이들은 동물 흉내를 내면서 즐거워한다. 작가 역시 <바싹 마른> 개에서 “너나, 나나, 어슬렁거리며 침 흘리고 다니기는 매한가지”라 생각하며 동물의 모습에서 자신을 본다.
그러나 필요 없는 동물은 언제라도 인간에게 버림받는다. 필요 때문에 오래 함께 살아왔어도 필요가 없어지면 금방 잊혀지는 것이 동물이다. 토사구팽이 사냥개를 비유한 것임은 그래서 흥미롭다. “지금은 사라진 청계천 삼일아파트”에서 발견된 개의 주검은 얼마나 오래 방치되어 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썩어 문드러져 마치 화석처럼 보인다. 한 때는 주인을 위해 ‘개같이’ 일했을 터임이 분명한 이 동물의 죽음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무성한 수풀 더미 위에 놓인 “죽은 개”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렸을 적부터 묶여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목줄은 죽어서까지 목을 파고들어오고 목줄에 걸린 쇠사슬은 주검까지 따라다닌다. 평생 묶여있었을 그 녀석의 생은 정말 ‘개 같은’ 생이었을 터이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개들에게도 죽음은 여지없이 찾아온다. 인간에게 한때는 사랑받았음에 틀림없는 애완견들도 개울가에 버려져 동사하고, “동지여 돌아오라”에서처럼 집 잃은 개들은 바깥세계의 법칙을 몰라 비명횡사하기 일쑤인 것이다.
사진의 초월적 폭력
<조류도감>은 현장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유형의 사진 촬영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쓰임새에 따라 억압과 통제, 감시 등의 장치로 기능하는 사진의 권력에 대해 성찰해보는 작업이다. 작가는 사진가를 지칭하기 위해 은어처럼 흔히 사용되는 ‘찍새’라는 말을 ‘조류’로 환치하여 사진 촬영이 진실을 보여주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단지 ‘모이를 줍는’ 것에 불과하다는 냉소적인 태도에서 출발한다. 미군병사가 성조기 앞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에서 작가는 사진의 우둔함에 대해 명료하게 언급한다. 요컨대 “이 미군이 성조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사진은 보여주지 못”하며 아울러 작가 역시 “성조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사진은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조류도감>에 등장하는 ‘찍새’에는 각종 언론사의 사진기자를 비롯하여 ‘모이의 종류가 다른’ 각 분야의 작가들, 기념사진을 찍는 일반인, 자료로 쓰기 위해 사진을 찍는 화가나 학자 등이 두루 망라되어 있다.
사진은 각자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 생산되게 마련이다. 그것이 사진의 의미를 바꾼다. 사진의 권력은 사람들에게 현실을 전달함으로써 그에 대해 반응하도록 하는 데서 그치지만은 않는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단순 구조란 실제로는 없다. 사진을 통한 메시지의 전달에는 이미 사진의 선택에서부터 필요와 목적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특별한 의도 없이 촬영한 사진의 경우에도 수용의 단계에서 목적은 애초의 맥락과 상관없이 개입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진 찍는 행위는 때로는 장려되고, 때로는 금지된다. 거기에서는 무엇을 찍느냐보다 누가 찍느냐가 더 중요한 고려사항이 된다. 사진은 단지 보여줄 뿐 말이 없기 때문이다. 사진의 우둔함은 무고하지만 해석은 위험을 수반한다. 그래서 작가는 결국 사진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사진가는 ‘위험한 새’이다.
사실 사진은 근원적으로 폭력으로부터 비껴가기 어렵다. 사진은 모든 개체를 타자로 전환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가장 따뜻한 마음과 정의로운 생각을 지닌 사진가라 할지라도 본래 스스로 주체인 모든 개체를 타자화시키는 사진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타자에 대한 존중의 의식에도 불구하고 내게 다가오는 개체를 타자로밖에 인식할 수 없는 이러한 구조를 데리다는 초월적 폭력이라 불렀다. ‘찍새’들에게 부여된 이 폭력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모른 척할 수는 없다. 적어도 그들은 윤리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 이러한 폭력에 대해 명료하게 의식해야 하며 스스로가 ‘위험한 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더 큰 폭력은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다. ‘찍새’들의 진정한 윤리는 그 지점에서 얘기되는 것이 마땅하다. 스스로 주체인 모든 개체를 타자로 추락시키는 사진의 폭력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작업노트에서 작가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사진가가 타인을 도와야 하는지, 혹은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의 당혹한 선택을 사이에 두고 고민한다. 선택은 쉽지만 판단은 어렵다. 그 상황에서 모든 ‘찍새’들은 찍는다. 그것이 이른바 ‘찍새’다. 작가는 이러한 상황을 “나는 찍는다, 고로 찍는다”고 말한다. 그것이 ‘찍새’의 윤리가 아닐까. 데리다는 초월적 폭력은 폭력의 부정성이 최소화된 상태이며 그것마저 저지르지 않는다면 침묵과 무의미라는 더 큰 폭력에 맞설 수 없다고 항변한다. 그것이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의 윤리이다. 그 또한 쉬운 선택이지만 판단은 어렵다.
그래서 수많은 ‘찍새’들은 현장에서 우선 찍고 본다. 판단은 나중에 하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 앞에서 수십 명의 ‘찍새’들이 셔터를 누르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라 할만하다. 작가는 “찍새들이 있기에 우리 사회는 나아질까, 나빠질까”생각하며 번민하기도 하지만 자신도 역시 동류에 속하기에 현장에서는 우선 찍는다. 그것이 현장의 윤리이다. ‘찍새’들은 <랑데뷰>에서처럼 무시무시한 총대 앞에서도 찍고, 어둠 속에서도 찍고, 절벽이나 전봇대와 같은 위태로운 장소에서도 찍고, 엎드려서도 찍는다. 하기야 죽어 사진으로만 남은 사람도 찍는데 어떻게 찍는 것이 무슨 대수겠는가. 하지만 이처럼 침묵에 맞선 ‘찍새’들의 저항이 어쩔 수 없는 최소한의 행위라 할지라도 폭력의 찌꺼기는 남는다. <조류도감>은 그 점을 알면서도 폭력을 저질러야 하는 괴로운 ‘찍새’들의 입장에 대한 쓸쓸히 고백이기도 하다.
국기의 상징적 권력
<국기사용법>에서도 힘과 권력, 폭력에 대한 성찰은 계속된다. 태극기가 지닌 상징적 권력이 얼마나 미시적으로 우리의 일상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권력이 미치는 범위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국기의 지배력은 강제성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상징적 권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국기가 지닌 권력, 혹은 국기에 부여한 권력은 어떠한 물리적 권력보다 강하다. 그 앞에서 감히 반항할 생각조차 품지 못할 때의 권력은 전횡을 부리기 마련이다. 국기의 지배력이 그런 것이다. 국기가 지닌 권력은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와 무관할 때만이 정당한 것이 된다. 국기는 국가의 상징이지 특정 집단의 상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국기는 흔히 동원되곤 한다. 절대 권력에 의탁하여 집단의 이익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숨은 의도가 거기에는 깔려있다.
작가는 <국기사용법> 연작을 구성하는 각 사진에 효과적으로 제목을 붙이면서 권력이 남용되는 사례를 흥미롭게 들추어내고 있다. <술집장식용>에서 국기는 공동체의식을 교묘히 자극하여 매상을 올리는 전략으로 사용되며, <경영대학원 체육대회용>에서 엿볼 수 있듯이 집단의 단합을 위해 등장하기도 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국기의 일반적인 용도는 역시 분단 문제와 관계할 때 가장 잘 드러난다. <북한 규탄용>이나 <뽈갱이 내려다보기용>에서의 태극기는 또 다른 나라 북한에 대한 극명한 차별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태극기는 성조기에 대한 친화력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한미혈맹지속용>에는 “혼연일체가 된 태극기와 성조기”가 티셔츠에 새겨져 있고, <가슴부착용>에는 군복차림의 남자가슴에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가 덩그러니 매달려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세계관과 다른 이념, 극단적으로 다른 역사의식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한국사회에서 태극기의 용도는 참으로 천차만별이다. <전쟁기념용>에서의 태극기와 <추모용>에서의 태극기는 얼마나 다른가. 이처럼 거대한 생각의 차이를 가로질러 국기를 든 사람의 행위는 국기의 상징적 권력 덕분에 쉽게 용인되는 것이 보통이다. 어쩌면 그 이유 때문에 국기를 앞에 세워 행위를 저지르는지도 모르겠다. 행위의 정당성과 무관하게 국기 앞에서 불손해질 수는 없는 까닭이다. 심지어는 정부권력조차도 국기의 상징적 권력 앞에서는 무기력할 때가 많지 않던가 말이다. 국기라는 상징적 권력의 횡포가 국기 자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를 가져다 쓰는 이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 점은 사진의 활용에서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상징의 남용은 커다란 폭력을 낳는다. 태극기 앞에서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소총을 든 미군병사가 태극기의 전면에 등장하는 <국토수호용>에서의 반쪽짜리 국기는 반감만을 낳는다. 그것은 <독도수호용>에서처럼 허리가 굽은 노인이 들고 있는 태극기의 소박한 권력을 알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저열한 폭력인 것이다. 국기의 권력이 그렇게 남용될 때 국민은 국기에 부여한 상징적 권력을 거둔다. <짐 덜기용>이 보여주듯 국기가 더 이상 정당한 권력이기를 그칠 때 그것은 짐이 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쓰레기 취급을 당한다.
종교권력의 변신
<면죄부> 또한 <국기사용법>에서처럼 상징적 권력과 그 권력이 왜곡되는 지점에 주목한 작업이다. 한국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이 신이라는 절대 권력의 독선적인 남용으로 배타적 종교로 변질되어 가는 모습에 천착한 이 작업에서 작가는 <조류도감>이나 <국기사용법>에서 제기하고 있는 권력의 활용과 폭력의 관계를 다른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종교적 믿음 또한 이념과 마찬가지로 도구적으로 사용될 때 폭력을 수반한다. 기독교 신앙의 상징인 십자가는 기독교인에게만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맞다. 마치 태극기가 한국인, 더욱 정확히는 남쪽의 한국인에게만 국가권력의 상징일 수 있듯이 말이다. 그 권력은 강제로 행사되는 것이 아니며 자발적으로 그 힘을 수긍할 때만 생겨난다. 그러한 종류의 상징을 권력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에게 권력을 강제할 때 폭력은 위험한 수위에 이른다. 문제는 그 권력이란 것이 본래부터 대상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사진을 필요에 따라 활용하듯이, 국기의 신성함을 용도에 따라 변형시키듯이 종교적 믿음과 그것의 상징 또한 남용될 수 있다. 자신의 신앙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경우, 신의 절대 권력을 세속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이용하는 경우 이러한 폭력은 흔하게 발생한다.
<하늘엔 영광, 땅엔 그을음>에서 도로 한복판에 놓인 거대한 십자가와 타다 남은 잿더미는 집착에 가까운 신앙이 얼마나 난폭한 행위로 돌변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행위를 저지른 당사자에게는 신념에서 나온 정당한 행위였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광란과도 같은 도발로 귀착하고야 마는 이러한 행위는 한국사회에서 빈번하게 발생한다. 광적인 신앙은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라 언어의 폭력으로도 나타난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에서 볼 수 있듯 자기들의 신을 믿지 않으면 사후에 잔인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공갈과도 같은 언어는 얼마나 난폭한가. 한편 물리적 폭력이나 언어의 폭력이 아닐지라도 신앙이 믿음을 강요할 때 폭력은 다른 형태로 우리 곁을 맴돈다. 절대자의 상징으로서의 십자가는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존중의 대상이다. 타인에 대한 존중에서 출발하는 근원적인 윤리의식은 타인에게 절대자인 그 상징에 대한 존중으로 확장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는 절대적이지는 않더라도 상대적 권력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보편적인 윤리의식의 확장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절대성의 상징인 십자가가 도시 전체에 퍼져있는 모습은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신성의 속화이며, 사회학적인 의미에서는 종교권력의 확장 내지는 사회적 침투이다. 급속도로 확산되는 종교권력은 <모든 죽음을 관장하시는…>에서 볼 수 있듯이 공동체의 거주지와 무관한 야산까지 퍼져 있으며, <아파트에 강림하신>에서처럼 대규모 아파트단지의 벽면에도 자리 잡고 있다. 타인의 종교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한편 종교권력이 정치적 당파성을 띠고 집행되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인권문제처럼 종교와 이념의 차이를 초월한 보편성을 설파하면서도 <어린이 천국교회>의 문구가 보여주듯 이념적 편향성이 종교권력과 결탁해 있는 것이다. 그 권력은 <꿇어!>에서 작가가 풍자적으로 제목을 붙인 것처럼 강제적 명령을 숨기고 있으며, “무릎 꿇고 회개하고 나라위해 기도하자”라는 문구가 말해주듯 신앙과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뒤섞어 특정종교를 보편주의로 제시하기도 하는 전술적 권력이기도 하다.
그 밖의 단상들
이처럼 한국사회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미시적인 폭력의 구조와 권력의 장치들을 인식하여 시각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노순택의 작업은 <잡생각>에서처럼 단상의 형태로 펼쳐지기도 한다. <빨갱이 병사는 남조선에서 태어났다>는 동포를 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기막힌 우리 현실에 대한 통렬한 상징이다. 적군을 내부에서 생산한다는 이 기발한 착상은 사실 엄밀히 따져보면 맞는 말이다. 사격연습을 위한 표적인지, 인민군 병사에 대한 단순한 표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작가의 말처럼 “인민군 병사를 양성하는 곳은 북조선만이 아니”어서 남한이 인민군 병사를 필요로 한다는 가혹한 역설을 상기시켜준다. 한편 <전쟁은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지속적으로 전쟁연습을 벌이고 있는 남북한의 현실에 대한 풍자이다. 창공 가득히 피어오르는 화염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이 땅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전쟁을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방관자의 자태를 하고 있다. 작가는 이 전쟁연습을 지긋지긋하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볼거리를 제공”하며, “구경꾼을 양산”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모순된 현실 속에서, 나아가 이러한 모순이 극명하게 펼쳐지는 사건의 현장에서 작가는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낀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농성현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쌀알과 접시, 구겨진 종이컵을 찍은 <당신들은 불린 쌀을 엎었다>는 사건의 핵심과 무관한 부수적인 사태라 할지라도 결국은 생존 문제라는 본질을 건드리고 있다. “따뜻한 아침밥을 짓기 위해 누군가 지난 저녁 물에 담가둔 쌀”, 그 불린 쌀이 바닥에 뒹굴고 있는 모습은 안타까움을 넘어 비애감마저 자아낸다. 현장의 긴박한 사태가 휩쓸고 지나간 후에 뒹굴고 있는 불린 쌀알은 그렇게 작가의 가슴에 파문을 던졌던 것이다. 생존권을 둘러싼 약자와 권력자간의 분쟁에서 작가가 느끼는 안타까움은 간절함으로까지 나아간다. <항복합니다…>에서 작가는 “제발… 항복하십시오…”라고 애원하기에 이른다. “해군기지 결사반대”라는 깃발과 바위틈에서 기적같이 피어오른 화초에 흰 속옷을 걸어놓은 모습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말리기 위한 것인지 항복 의사의 표시인지 알 수 없는 이 기묘한 장면에서 작가는 생존을 위한 싸움에서 생이 깎여나가는 현실을 보았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어느 편이 됐든 “제발… 항복”해서 이 지루하고 고단한 싸움이 끝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작가의 궁극적 바람이 아닐까.
노순택이 한국사회의 구석구석에 퍼져있는 폭력의 장치와 권력이 미치는 범위를 들추어내는 작업에는 예민한 후각을 지닌 동물적 본능과 차분한 반성적 사유가 공존한다. 그것이 중요한 덕목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근저에는 폭력을 멀리 하고자 하는 마음과 그것이 진정 사라져버리기를 바라는 간절한 애원이 있다. 그것이 작가를 집요한 현실주의자로 만드는 힘이자 실천의 윤리이다.
6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