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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윤리와 시선의 권리 ; 노순택 사진의 문제의식 _ 박평종 2007.7


시선의 윤리와 시선의 권리 – 노순택 사진의 문제의식

 

1. 탈이념의 시대

1990년대는 보통 탈이념의 시대로 규정되는 듯하다. 이는 80년대를 이념의 시대로 이해하는 시각의 연장으로, 80년대 후반의 국내외 정세변화에 대한 기민한 해석과 관계를 맺고 있다. 80년대는 한국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관점의 다양성이나 편차에도 불구하고 이념 갈등이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갈등은 한국 근현대사 전체를 관통해 온 문제인 까닭에 80년대를 이념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은 그 시대가 이념갈등이 최고조에, 혹은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다른 식으로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90년대를 탈이념의 시대라고 부르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며, 80년대와의 차별성 또한 분명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차별성의 근거로는 보통 냉전 이데올로기의 종식을 거론하는 것이 상례인 것처럼 보인다. 소비에트 연방과 동구 공산권 국가들의 몰락이 결정적인 것이다. 국제정세의 이러한 지각변동은 한국사회의 이념 논쟁에도 직접 영향을 미쳤다. 이념 논쟁이 급속도로 위축되고 사회운동의 방향과 노선 설정에도 혼란이 생겨나 그야말로 탈이념의 길로 접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한국사회의 성격 규정을 둘러싼 시각이 80년대에 비해 더욱 복잡해지고 편차를 띠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주요한 특징은 좌파 이데올로기의 급격한 위축이다. 이는 그 이념을 따랐던 이들이 중심을 잃고 표류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80년대까지의 이념론자들은 이념을 과학으로 여겼고 그것을 다시 신념으로 삼았다. 반면 90년대에 이르러 이념은 신념이 아니라 의심과 회의의 대상으로 바뀌어 갔다. 이념보다는 모든 불평등과 억압, 사회적 모순, 착취를 낳는 저변의 문제를 근원에서부터 다시 되짚어나가는 연구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권력과 폭력, 주체와 타자, 이성과 비이성 등 문명사의 시작에서부터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가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80년대가 이념의 시대였던 만큼 그 시대의 문화 또한 이념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수많은 예술인들이 이념 자체를 걸고 싸웠던 것은 아니지만 그 시대의 온갖 모순과 억압이 결국 이념과 직간접적으로 얽혀있었던 탓에 본질적으로는 80년대의 예술 또한 이념의 시대라는 특수성과 맞물려있었다고 하겠다. 80년대의 뛰어난 시와 소설은 냉전이데올로기의 산물인 분단문제를 다루거나 야만적인 국가권력에 대한 항거의 형태를 띠고 있었고, 동시대의 민중미술 또한 이와 유사한 형태를 하거나 거기에서 더 나아가 시대의식을 계급의 문제로까지 확장시켰다. 70-80년대 한국의 가장 뛰어난 작가들이 그 과정에서 배출되었으며, 그들은 이제 한 시대를 상징하는 예술가들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한편 사진가들은 문화, 예술계 전체가 이념갈등으로 몸살을 앓으며 구체화시킨 80년대식 예술과 일정한 거리를 두어왔다. 80년대의 한국사진은 동시대 한국의 문화예술과는 큰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시대가 낳은 한국사진의 성과를 찾는 데에 인색할 이유는 없겠지만 적어도 동시대 예술의 맥락과 유리되어 있었다는 비판은 정당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80년대의 시대의식에 공감하여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 보여주고자 했던 사진 작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분단문제는 기록의 형식 하에 꾸준히 사진가들이 천착해 왔던 주제이다. 80년대 초반 <현실과 발언>전에 참여하면서 시대의식을 표출해 왔던 정동석이 그 예이다. 1983년부터 1989년까지 비무장지대의 해안선을 대상으로 한 작업을 통해 그는 분단 상황을 구체적으로 형상화시켜냄으로써 이후 분단을 주제로 한 다른 사진작업의 이정표를 제시했다. 또한 강용석은 1984년 동두천 미군기지의 기념사진 작업을 통해 분단이 야기한 한국사회의 기이한 한 단면을 추출해냈다.

한편 1990년대를 거쳐 2000년대에 이르면 80년대의 치열한 시대의식은 문화예술계 전반에 걸쳐 상당히 퇴색한 듯한 인상을 준다. 실제로 80년대의 문학과 미술이 가졌던 문제의식에 비추어 보면 이 시기에 생산된 다수의 작품들은 너무 급격하게 전 시대의 화두와 단절해버렸다는 혐의를 두게 만든다. 어느 문학비평가가 90년대식 댄디라고 불렀던 것처럼 이 시대의 반항아적인 작가들은 야만적이고 부도덕한 권력과 제도에 맞서기보다는 오히려 보편문화를 속물적이라 규정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킴으로써 자신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태도를 취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전에는 서구 자본주의의 찌꺼기로 여기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소수만이 향유할 수 있는 고급문화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 스스로를 차별화하는 데에 주의를 쏟았다. 또 다른 작가들은 탈이념의 시대를 이끈 서구의 담론을 수용하여 역사 대신 일상을, 제도 대신 개인의 욕망을, 정치권력보다는 문화적 취향을 이 시대 예술의 주요 주제로 삼는다. 나아가 예술작품의 가치를 의미보다는 소통의 융통성에서 찾는 이들은 예술과 대중문화의 차이를 지워나간다. 80년대를 지배했던 문학과 미술의 논리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를 찾아보기란 어려운 일이어서 이제 그 시대의 예술은 역사로만 기억될 뿐이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의 성격 자체가 80년대에 비해 크게 달라졌다고 말해야 하는가.
한국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문제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부터 근대식 경제 구조의 성립과 자본의 형성과정, 민족주의, 냉전논리 등 제반문제를 총체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지난한 과제임에 분명하다. 이는 한 개인의 세계관을 통해 손쉽게 정의될 수 없는 까닭에 후일 학자들의 연구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만 분명한 점은 80년대의 문제의식이 더 이상 현재의 예술가들에게 과거만큼 큰 비중을 지닌 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한국의 사진가들은 80년대의 문제의식을 오히려 탈이념의 시대로 진단할 수 있는 90년대 이후에 더욱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한 모습은 특히 분단 상황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동두천 기념사진 작업 이후 강용석은 1999년에 발표한 <매향리 풍경>을 통해 한국사회가 여전히 냉전 이데올로기의 각축장임을 보여주었다. 그 밖에도 박진영, 손승현과 같은 젊은 작가들은 한국사회에 남아있는 다양한 분단의 상징들과 장기수 문제 등을 주제로 한 작업을 통해 분단 문제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웅변하고 있다.

2. 폭력에 대한 시각적 탐구

분단문제를 예의주시하는 많은 작가들 중에서도 노순택의 작업은 분단이 한국사회를 특징짓는 하나의 단편적인 상황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모든 현실과 복잡하게 얽혀있는 근원적인 문제임을 다각도로 보여주고자 한다는 점에서 값지다. 2000년대에 들어 그가 발표한 많은 연작들은 일관되게 한국근현대사가 잉태한 가장 첨예한 모순을 형상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관심이 분단 문제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2004년에 가진 개인전 <분단의 향기>의 작업노트에서 작가는 ‘제도적 폭력’을 화두로 작업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분단 상황에서 비롯된 모든 갈등과 비극, 희생은 결국 폭력을 묵인하는 제도와 얽혀있음을 작가는 말하고자 한다. 제도화된 폭력을 낳는 한국사회의 구조는 근현대사의 형성 과정 속에서 이미 충분히 예견된 것이다. 작가가 놓치지 않고 찾아낸 수많은 현실의 선례에서도 알 수 있듯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희생의 악순환은 부도덕한 개인이나 우발적인 상황이 야기한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생겨날 수 있는 구조적인 문제이다. 작가가 형상화시켜낸 다양한 예들, 예컨대 5.18 광주 항쟁, 국가보안법, 매향리 문제, 여중생 압사사건, 평택 대추리 사태 등은 각각 서로 무관한 개별적인 사태가 아니라 모두가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제도적 폭력과 관계한다. 분단은 그러한 제도적 폭력을 낳게 한 가장 직접적인 요인이자 자명한 현실태이다. <분단의 향기>를 구성하면서 작가는 자신의 기획 중의 하나인 <잠시 멈춘 전쟁>에서 많은 사진을 끌어왔다고 밝히고 있다. ‘잠시 멈춘 전쟁’이라는 표현은 한국전쟁이 미소 양국의 대리전쟁이며 휴전이 냉전 이데올로기의 연장을 위한 전략적 협상의 산물임을 말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쟁이 남긴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고, 심지어 전쟁은 현재 진형형이기도 하다”는 작가의 생각을 함축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전쟁은 끝났지만 희생자들은 여전히 배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매향리 주민이 그렇고, 주한미군 궤도차량에 압사당한 두 여중생이 그렇고, 무고한 대추리 주민들이 그렇다. 그런 점에서 90년대 이후를 탈이념의 시대로 규정하는 시각은 작가에게 못마땅할뿐더러 현실을 잘못 진단하는 오류일수도 있겠다. 이데올로기는 자본이라는 현실 앞에 무너져 내렸지만 한국사회의 역사적 모순은 여전히 그대로인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이념에 너무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일까, 아니면 자본의 위력을 간과했던 것일까.
많은 비판적 지식인들과 작가들은 90년대 현실의 충격을 속으로 감내하면서 이데올로기를 근원적으로 다시 고민하고 새로운 전망을 모색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90년대는 또 다른 측면에서 혼돈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내면적으로 더욱 성숙해질 수 있었고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을 확장시킬 수도 있었다. 한국사회의 모든 부조리가 단지 이념 갈등이라는 하나의 줄기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거나, 한국의 역사적 모순에는 한국적 특수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적 보편성도 함께 스며있음을 좀 더 상세하게 간파해낼 수 있었던 것은 차분한 성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한 성찰의 바탕 위에서 노순택은 한국사회를 분석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이 사회는 ‘잠시 멈춘 전쟁’ 탓에 항상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으며 우리 모두는 제도적 폭력의 잠재적 희생양이다. 작가의 또 다른 기획 중의 하나인 <비상국가>는 이러한 논리의 연장으로 위기 상황이 우리의 일상 도처에 침투해 있으며 이러한 상황이 결국은 제도적 폭력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국가구성원들과 공권력이 충돌하는 사태는 일상처럼 되풀이되고 있어 그것이 제도화된 폭력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만큼 우리 모두는 둔감해져있다. 노동쟁의와 파업, 미군 철수 문제, 국가보안법과 같은 80년대의 화두는 이 시대에 진부한 논의처럼 간주되거나 비판적 지식인들 사이에서조차도 점차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노동조합에도 귀족주의가 있고 파업에도 집단 이기주의가 침투해있는 경우는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분배의 불평등구조는 여전히 한국사회의 심각한 사회문제로 남아있다. 그 점을 거론하지 않고 모든 노동쟁의를 집단이기주의로 몰고 가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의 윤리의식이 위험수위에 이르렀음을 반증한다. 
작가가 천착하는 제도적 폭력이란 한국의 근현대사가 겪었던 가장 야만적인 폭력이 일상 도처에 빗물처럼 스며들어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까닭은 폭력이 순화된 채로 퍼져나가 마치 삶을 지배하는 제도처럼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폭력을 감지하는 우리의 의식이 무디어져 있는 탓도 크다. 그런 점에서 폭력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19세기의 생디칼리즘이나 유물론은 정당한 폭력을 옹호함으로써 폭력은 폭력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임에서 반칙은 폭력이다. 반칙을 하는 사람에게 규칙을 준수하는 사람은 이겨낼 재간이 없다. 그렇다면 게임에 이기기 위해서는 똑같이 반칙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폭력을 정당화하는 가장 단순한 논리이다. 폭력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는 그것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렇다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는 폭력과 무관할 터이다. 상대에게 위해를 입히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폭력은 선악의 논리와 깊이 얽혀있다. 한편 폭력의 주체가 없는 폭력도 있다. 폭력의 저열함은 주체의 의도에서 나오지만 의도와 무관하게 펼쳐지는 폭력은 무고한 폭력이다. 하지만 알면서 저지르는 폭력과 달리 모르면서 범하는 폭력은 수위의 완급을 조절할 수도, 파급력을 짐작할 수도 없어 더욱 가혹한 폭력으로 귀결될 수 있다. 나아가 가장 근원적인 폭력이란 본래 모든 언어에 내재되어 있다. 무고한 폭력, 선악의 너머에 있는 폭력도 폭력이라면 그것은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폭력은 이처럼 쉽게 체감할 수 있는 물리적 폭력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주체도 없고, 형체도 없고, 심지어는 제물조차 없는 폭력도 있다.
80년대는 이념을 한국사회의 모순과 폭력의 구조를 판단하는 흔들림 없는 잣대로 삼았다. 그런 까닭에 이념이 몰락한 90년대 이후의 작가들이 똑같은 문제 앞에서 혼란스러워하거나 혹은 질문을 유보하는 모습은 어쩌면 자연스럽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한편 노순택은 폭력을 정의하는 유연한 시각을 받아들여 폭력성을 숨기고 있는 폭력까지 감지해내는 예민한 감식력과 관찰력을 통해 한국사회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은밀하게 일상 속에 숨어있던 폭력의 흔적이 그의 시각을 통해 드러날 때 그것은 난폭하고 두려운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기괴하다 못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우익단체들이 벌이는 각종 집회, 가상의 적에 대비한 테러대비훈련, 상업주의에 휘둘리는 분단의 상징물 등의 모습에서 풍기는 코믹함은 한국사회의 제도적 폭력이 치졸함에 이르렀음을 말해주고 있다. 폭력의 매너리즘이라고나 부를 수 있을 법한 이러한 상황 앞에서 코믹함은 때로 비애감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대형 태극기와 성조기를 나란히 펼쳐놓고 한미 우호를 염원하는 인파들, 대형 성조기 옆에는 마치 연방의 한 주를 상징하는 별과 비슷한 크기의 소형 태극기가 함께 놓여 있는 것이다. 사진이 메타포로 보여주는 것은 분명 진실이 아니지만 작가는 약간의 테크닉을 통해 그것을 마치 현실처럼 드러내 보여준다. 그렇게 사진에서 현실과 허구의 거리는 개념의 차이만큼 크지 않다.
작가는 <풍경사진의 불순함>에서 선택과 배제를 사진가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적극적인 수단이라고 말한다. 본래 선택과 배제는 필연적으로 현실의 왜곡이자 변형을 수반한다. 그래서 진실을 보여주고자 하는 사진가에게는 ‘시선의 윤리’가 부과된다. 그러나 가능한 모든 왜곡의 장치를 제거한 사진조차도 결코 본래적인 의미에서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는 엄정한 사실과,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진실이란 ‘시선의 윤리’와 상관없이 이미지의 뒤편에 은닉한다는 명제 앞에서 ‘시선의 권리’가 솟아난다. 선택과 배제는 그래서 오히려 작가의 시각을 드러내는 적극적인 도구가 된다. 그가 현실 속에서 선택한, 혹은 불필요한 요소를 배제함으로써 얻어낸 현실의 단편들은 이처럼 ‘시선의 윤리’와 ‘시선의 권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구체적인 형상을 얻는다. 시선의 윤리는 시선의 폭력에서 비껴가고자 하는 의식에서 나온다. 한편 시선의 권리는 시선의 폭력이 가장 진실한 윤리 의식을 통해서도 결국 피할 수 없다는 점에 기대고 있다. 그렇다면 윤리와 권리는 양립할 수 없는가. 하지만 작가는 양자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감각적으로 체득한 듯하다. 시선의 윤리란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상에 대한 존중의 의식이다. 현상을 본래 그대로, 진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시선의 윤리라고 믿는다면 이는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이다. 윤리적인 시선이란 현실 자체를 지향하는 것일 테지만 현실이란 결코 본래 그대로 시선에 붙잡히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결백한 시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선의 무고함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시선을 거두어야 한다. 하지만 부조리하고 난폭한 현실 앞에서 시선을 거두는 것은 시선의 직무유기이자 폭력을 방관하는 태도이다. 그래서 시선의 권리를 회복하는 것은 폭력에 대한 저항이자 거기에 맞서는 전투와도 같다. 시선의 윤리가 폭력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제 시선의 권리는 폭력과 싸우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윤리와 권리는 서로 다르지 않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 위에서 작가는 세상의 폭력을 들추어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시선의 권리를 행사한다. 그것은 변형된 폭력이 아니라 윤리를 실천하는 또 다른 방법이기도 하다. 윤리에 대한 명료한 의식을 바탕으로 이제 작가는 시선의 권리를 집행하는 효과적인 수단들을 차근차근 찾아나간다.

3. 역 판옵티콘

<얄읏한 공>은 미군기지 이전 장소로 지정된 평택 대추리 지역의 군사시설물에 대한 꼼꼼한 관찰의 결과물이다. 이 작업을 통해 작가는 진실의 형상화에 대한 열망이 부과한 강박관념을 사뿐히 뛰어넘어 시선의 의무를 수행한다. 무관심 속에 은닉되어 있던 정체불명의 구조물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는 당위가 그를 잡아 끈 것이다. 작가가 ‘공’이라 부르는 이 물체는 그의 조사에 따르면 레이돔이라는 고성능 탐지장치로 대추리의 황새울 들판에 자리잡고 있다. 이 레이돔은 원거리에서 지평선에 낮게 깔린 모습을 보면 골프공처럼, 혹은 탁구공처럼 보이고 조금 확대하면 테니스공이나 배구공처럼 보이며, 근거리에서 제대로 보면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구나 물탱크처럼 보이기도 한다. 위부분만 잘라내어 보면 대머리와도 닮았다. 어쨌든 ‘공’의 형상을 한 이 물체는 작가의 말처럼 이상하고 야릇하게 생겨 호기심을 부추기고 상상력 또한 자극한다.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의심 때문이었는지 작가는 3년 동안 대추리를 왕래하며 야릇하게 생긴 이 ‘공’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하기에 관심을 쏟지 않았더라도 대추리 어느 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이 ‘공’은 저절로 시야에 들어왔을 것이다. 이를 강변이라도 하듯이 작가는 장소를 바꾸어 가며 도처에서 이 ‘공’을 바라본다. 이 해괴한 물체는 눈을 땅바닥에 붙여도 보이고, 일하는 농부의 겨드랑이 사이로도 시야에 걸린다. 무성히 우거진 수풀도 이 ‘공’을 가리지 못하며, 농가의 축사에서도 보인다. 거대한 수목도 가리지 못하는 이 ‘공’, 태양이 물러난 한 밤에도 달빛을 받아, 혹은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자취를 드러낸다. 자신보다 더 큰 구조물이 가려도 틈새로 고집스럽게 모습을 내보이는 집요한 ‘공’, 들판을 한참 가로질러 멀리 떨어져도, 사람들이 모여 북적거리는 와중에서도, 심지어는 마을을 벗어나도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는 말은 어디를 가더라도 숨지 못한다는 뜻과도 같다. 감시의 시선이라 불릴 법도 하다. 그런 점에서 대추리 지역 구석구석에서 이 ‘공’을 잡아낸 작가의 시선은 역판옵티콘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단일한 하나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어 감시와 통제의 장치로 불리는 판옵티콘은 어디에나 있다. 이러한 장치는 작가가 말하는 제도적 폭력의 광범위한 확장을 보여주는 예이다. 시선의 폭력을 효과적으로 드러내 밝히기 위해 작가는 판옵티콘의 시선을 역 추적하여 그 시선이 가닿을 수 있는 모든 곳에서 감시의 눈을 바라본다. 시선의 역전이 일어나는 셈이다. 감시당하는 자의 시선이란 본래 나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감시자의 눈을 보려면 눈을 부릅뜨고 마음을 모질게 먹어야 한다. 작가의 시선은 그런 점에서 강인하기도 하고 저항적이기도 하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해괴한 구조물을 곁에 두고도 아무 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이들을 대신하여 작가는 이 물체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 사실 몰라도 큰 상관없을 수 있다. 어쩌면 모르는 편이 더 마음 편할 수도 있을 터이다. 왜냐하면 오래 보다 보면 “없던 정도 싹트는 법”(작업노트)이며, 타 지역에 있더라도 그 공만 보면 “저그가 우리 동넨갑다 생각하고 반가운 맴이 들기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도적 폭력의 구조를 들추어내고자 하는 작가의 꿈틀대는 욕망은 쉽게 그 물체에 정붙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관심은 갖되 거리를 두고, 끈끈한 눈으로 관찰하되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이 ‘공’의 생김새와 구성에서부터 구조물의 형태, 공이 위치한 주변의 지형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관찰을 해나간다. 거대한 철근 구조물 위에 안락하게 둥지를 튼 이 ‘공’은 웅장한 자태를 하고 있다. 구조물의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새털구름의 리드미컬한 무늬와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지만 바로 뒤편으로는 들짐승조차 접근할 수 없도록 날카로운 철책이 가로막고 있다. 주변을 나는 새 떼와 어우러지면 이 ‘공’의 자태는 한결 돋보인다. 거대한 수목 사이로 한밤중에 모습을 드러낼 때는 보름달처럼 둥실 떠올라 낭만과 향수마저 자아낸다. 멀리 하늘 높이 떠있는 진짜 달과 비교하면 지상의 달이라고 불릴 법도 하다. 그 예쁜 생김새에 속지 않으려면 좀 더 자세히 보아야 한다. ‘공’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체 속에서, 전체와 맺고 있는 관계를 같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공’은 밭일하는 농부의 저 멀리 뒤편에 도사리고 있다. 열심히 밭을 가는 농부의 눈에 그것은 들어오지 않는다. 하긴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일 것이며 주의를 끈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밭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인물은 화면 중앙에 자리하고 있어 마치 사진의 중심 주제처럼 보인다. 중앙 부분은 그의 노동을 부각시키기라도 하듯 밝고, 주변으로 갈수록 어둠이 퍼져 시각적인 집중도는 약해진다. ‘공’은 밝음과 어둠의 경계 어딘가에 간신히 걸려있어 주의를 기울여야만 보인다. 그렇게 해서 작가는 관객들로 하여금 화면 전체를 꼼꼼히 살펴보도록 요청한다. 화면의 주변도 중앙과 같은 화면에 속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마치 숨은 그림 찾기 문제를 내듯 ‘공’을 여기저기 숨겨놓았다. 여유롭게 산책하는 강아지 뒤편으로 드넓게 펼쳐진 농촌 풍경 어딘가에 묻혀 있는 점과도 같은 이 ‘공’을 사람들은 찾아낼 수 있을까. 허리가 휘도록 잡초를 메는 아낙의 머리 위에도, 장화 신고 논바닥에서 일하는 농촌 여인의 뒤편에도, 들꽃을 따는 소녀의 전방 수 킬로미터 앞에도 ‘공’은 태연자약하게 떠 있다. 미군기지 이전을 반대하는 마을주민들의 농성 현장에도, 그들을 진압하려는 공권력 집행자들의 머리 위에도, 짚단을 되새김질 하고 있는 소의 등 위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끈덕진 ‘공’. 이쯤 되면 이제 이 ‘공’은 좋건 싫건 마을의 일부이다. 마치 시골 마을이면 어김없이 한 그루씩 있어 그 지역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는 당산나무처럼 이 ‘공’은 대추리의 명물이다. 근 십년 가까이 마을의 역사와 호흡을 같이 해 온 이 ‘공’, 하지만 그것은 마을의 상징이 아니라 미군기지의 상징이다. 군사작전, 곧 전쟁을 돕기 위한 이 ‘공’은 가장 평화로운 마을 중의 하나에, 그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작가는 ‘공’을 사냥하듯 셔터를 눌러댔다. “사람 죽이는 일을 거드는 흰 공은 사라져야 마땅”(작업노트)하다는 염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한편 작가가 ‘공’에 대한 시각적 보고서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마치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추리소설처럼 긴장과 흥미를 자아낸다. 레이돔이라는 군사시설물은 골프공이나 탁구공, 혹은 배구공이나 기구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보름달이나 대머리의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변화무쌍하게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는 탓에 대상에 대한 궁금증은 증폭되고 정체를 알고 싶은 호기심으로 신비감은 배가된다. 사실관계를 정직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일반적인 다큐멘터리 사진의 원칙에 비추어 보자면 이러한 형식은 새롭다. 근거리와 원거리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또는 눈높이를 부지런히 바꾸어 가며 ‘공’의 정체를 추적해나가는 작가에게 ‘시선의 윤리’란 낡고 진부할뿐더러 자유로운 시각을 가로막는 교과서적인 원칙에 불과하다. 레이돔을 ‘공’으로 둔갑시킨다 할지라도 우선은 사체를 부검하듯 샅샅이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시선의 권리인 동시에 시선의 의무이기도 하다. 적의 동태를 탐지하기 위한 척후병과도 같이 작가는 갈대숲에 바짝 엎드려 조심스럽게 다가가 시야를 가로막는 풀잎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하얀 ‘공’을 살핀다. 광각렌즈가 만들어 낸 과장된 원근감 탓에 ‘공’과의 거리는 실제보다 멀어 보인다. 그 사이에는 산이나 언덕, 고층건물 하나 없어 ‘공’은 드넓은 벌판에 덩그러니 솟아있다. 작지만 유난히도 밝고 흰 까닭에 이 ‘공’은 시야의 그물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 작가는 ‘공’을 주변사물과 연계시키거나 전체의 공간 속에 교묘하게 배치하는 전략을 통해 적극적으로 시선의 권리를 행사한다. 거기에서도 선택과 배제는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거리와 앵글, 각도, 원근법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작가는 ‘공’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낸다. 시야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 이 얄미운 ‘공’을 포크레인으로 한 삽 떠다가 옮겨버리거나, 쇠스랑으로 이삭을 긁어낼 때 같이 긁어버리고 싶은 것이 작가의 심정이다. 하지만 위장술까지 능한 이 ‘공’은 점박이 쌍둥이까지 있어 밤이면 쉽게 분간이 되지도 않는데다가, 무장한 국가권력이 떠받치고 있어 쉽게 없앨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래서 얄밉다.  

4. 사자(死者)의 귀환

<얄읏한 공>이 분단과 제도적 폭력의 문제에 접근하는 우회적 언어라면, <망각기계>는 폭력의 야만성을 잊지 말자는 무겁고도 강렬한 직접적인 전언이다. 5.18 광주항쟁 희생자들의 영정사진을 복원하는 형태로 이루어진 이 작업을 통해 작가는 한국 현대사 속에서 자행되어 온 살육과 야만의 역사를 환기시킨다. 한국의 근현대사가 크고 작은 비극으로 얼룩져 왔다는 사실은 새삼스럽게 되새기지 않더라도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역사의 질곡이다. 그 진실의 중압감에서 자유로운 이는 어디에도 없다. 만약 그로부터 자유로운 이가 있다면, 그 중압감을 경쾌하게 털어버리고 해맑게 웃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초인이거나, 현실의 바깥세계에 살고 있는 둔한 인간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초인에도, 둔한 인간에도 두 부류가 있다. 초인의 첫 번째 경우는 주어진 현실의 한계를 초월적 사유를 통해 극복해 나가는, 고양된 지성의 전형적인 유형이 되겠다. 여기에는 현실에 대한 명증한 인식과, 현재 주어진 현실을 문명사 전체를 아우르는 거시적인 안목 하에서 진단할 수 있는 혜안과 통찰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조건이 따른다. 현실을 물리적인 방식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판단이 진정으로 자명할 때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인가. 비극적인 현실을 넘어설 수 없다는 명석 판명한 인식에 초월적 사유가 따르는 것은 스스로 원해서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어서이다. 이러한 태도는 물리적 현실을 실제 삶으로부터 유리시키려한다는 점에서 현실 도피적이지만 개인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그것 말고는 없다. 난폭한 현실과 부딪쳐 자멸의 길을 걷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나약한 개인만 파멸한다는 것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찢김의 길을 걷는 인간의 모습은 그래서 한편으로는 숭고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비극적이다.   
초인의 두 번째 경우는 블랑쇼가 초탈을 실천하는 인간의 유형으로 제시한 자연 상태의 인간, 이를테면 타자를 고려치 않는 인간이다. 자연은 본래 난폭하며 파괴를 본성으로 삼고 있다. 파괴와 생성의 순환이 자연의 영속성을 담보한다는 점에서 파괴는 자연의 일부에 해당한다. 타자에 대한 폭력을 비껴가는 행위, 타인을 의식하고 존중하는 행위는 그런 점에서 자연의 본성에 부합하지 않는다. 악을 실행할 때 보통의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의식하게 마련이며 그 때문에 악행에는 자연스럽게 죄의식이 따른다. 타인을 고려하는 행위에는 결국 필연적으로 제약이 따르며 행위의 가능성은 축소된다. 축소된 가능성만을 사는 인간의 행위는 협소할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나약하기조차 하다. 반면 난폭한 자연의 본성을 따르는 인간이란 모름지기 타인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인간, 그 앞에서 일말의 감정의 동요도 없는 강인한 인간, 그것이 초탈의 상태에 접어든 인간이다.
현실의 바깥에서 살아가는 둔한 인간의 유형은 어떠한가. 첫 번째 유형은 무관심의 확장이 곧 현실에 대한 인식의 결핍으로 이어지는 경우이다. 부정과 불의, 악행에 대한 무관심을 죄라고 할 수는 없다. 어떤 점에서 무관심은 무고할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권리이기조차 하다. 그러나 사람이 권리만 갖고 살 수야 없지 않은가. 나아가 타인에 대한 관심은 개인의 존재를 지탱하는 구조이자 질서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과 확인 없이 ‘나’의 존재는 가상태로만 있다. 바로 그 ‘나’가 현실의 나로 서기 위해서는 세계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보아야 한다. 세계에 대한 관심은 그래서 자신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타자에 대한 관심은 결국 타자를 고려하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자신을 진정한 존재로 세우기 위한 것이다. 관심이란 본래 상호(inter) 존재(esse)를 뜻한다. 반대로 무관심이 상호존재의 박탈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세계의 질서에 위배되는 행위가 된다.
둔한 인간의 두 번째 유형은 의도적인 무관심과 맞닿아 있다. 대상에 대한 관심이란 본래 의지적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관심은 나의 의식이 대상을 지향할 때 생겨난다. 지향은 본래 능동성과 수동성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지만 아무래도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능동성에 좀 더 가깝다. 그래서 관심에는 의지, 혹은 의도가 섞여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반면 무관심은 의지의 공백상태를 가리키며 그것의 본성은 비의도성에 있다. 대상에 대한 어떠한 의도도 없는 백지상태의 의식, 그것이 무관심을 낳는다. 그렇다면 의도적인 무관심이란 해괴한 의식이다. 순수한 무관심이란 불순함과 순결함 어디에도 기울지 않는 중립성이 의지의 공백을 채우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의도가 섞이지 않은 무관심은 결백하며, 그것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무관심이다. 그렇다면 의도적인 무관심이란 기형이자 일탈이며 무관심의 본성을 벗어던진 왜곡된 의식이다. 의식의 탈선이라 할 만하다.

작가는 5.18 광주항쟁 희생자들의 일그러지고 훼손된 형상을 통해 망각의 악행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망각은 본래 죄악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 기억이 의지적이라면 망각은 비의지적이기 때문이다. 원치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이, 자연히 잊혀지는 것이 망각이라면 그것은 무고하다.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될 것도 있다. 폭력의 역사에서 배워 취할 것이 있다면 폭력의 야만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폭력은 망각을 먹고 자라나 끊임없이 순환되는 까닭이다. 폭력의 희생자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명제는 윤리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적 전망의 차원에서도 필요한 당위적 요청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역사는 쉽게 잊혀진다. 이러한 망각은 초인의 비윤리적 형태나 무관심을 의도적으로 실행해나가는 둔한 인간의 유형에서 쉽게 발생한다. 그 때의 망각은 형태는 달라도 결국은 의도적이다. 무관심에 스며있는 의지가 그렇듯이 말이다.
얼굴의 형태조차 알아보기 힘든 사진 하단에 작가는 희생자들의 이름과 생몰년도, 사인(死因)까지 기입해 놓음으로써 그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힌다. 가족조차도 온전히 얼굴을 식별할 수 없는 일그러진 얼굴에 인적사항을 끼워 넣음으로써 육신도 잃고 이름까지 잊혀졌던 사자(死者)들이 현실세계로 귀환한다. 망각을 엄중히 질책하는 귀환이다. 육신은 망가졌지만 존재는 우뚝 서서 망각의 역사를 꾸짖는 것이다. 그들의 꾸짖음에 귀 기울여야 하는 까닭은 폭력의 역사가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업노트에서 오딜롱 르동의 말을 인용하여 “사진은 단지 죽어있는 것을 전달해 줄 따름”이며 “나머지는 누구의 몫인가”를 묻고 있다. 폭력을 피하고 줄여나가 결국 폭력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나머지 몫이 아닐까. 사실 끝없이 되풀이 되는 폭력의 역사에 비추면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팽개쳐버릴 수는 없다. 암울한 현실을 초월적 사유로 극복해나가는 것은 전망이 없을 때뿐이다. 전망은 때로 만들어나가야 할 때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꾸 과거를 환기시켜 반성과 성찰을 되풀이해보아야 한다. 한국사회의 성격이 80년대에 비해 큰 폭으로 변화하기는 했지만 현실을 바라보는 문제의식마저 근본적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 폭력의 역사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한 말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의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는 폭력의 잔해를 일관된 관점 하에서 들추어내고 형상화하는 작가의 작업은 비판적 문제의식이 점차 시들어가는 9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나태함에 대한 따가운 질책이기도 하다.

박평종 _ 미학 | 사진평론
[월간사진] 2007년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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