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wired.com/rawfile/2012/08/suntag-n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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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모르던, 지금은 아는 남자

 

 

 

  

사진을 본다는 건, 과거를 되짚는 일이다.

 

운명적으로 그러하다. 10년 묵은 사진엔 10년 전의, 방금 찍은 사진엔 방금 전의 과거가 묻어 있다. 그러니까 사진을 꾸준히 ‘한다’는 건, 부단히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이고, 다소간 과거지향적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거를 몸으로 버틴 탓에 오늘을 살고 있지만, 그 버팀이 앎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과거를 모른다. 전적으로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어설프게 앎으로써 혹은 잊음으로써 현재를 누릴 핑계를 얻는다. 지나간 시간이여, 가물거려 다오. 그때 비로소 너를 허락할 수 있나니.

 

나는 한동안 대추리에서 작업한 사진들을 들춰보려 하지 않았다. 미군기지 이전사업으로 인한 갈등과 충돌이 첨예할 당시엔 기고와 선전물 제작 등 ‘지금 당장의 연대’를 위해 실시간으로 사진을 꺼내 썼지만, 그 후에도 필요할 때마다 곶감 빼먹듯 야금야금 사진들을 꺼내어 쓴 것도 사실이지만, 사진 모두를 낱낱이 살펴본 적은 없었다. 3년여에 걸친, 잠시 동안은 마을에 살면서 진행했던 그 작업은 일단 양이 많아서 한 장 한 장 살펴보기 힘겨운 일일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그 때 그 곳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일이었기에, 마음이 허락하질 않았다. 6년 전이란, 가깝다기엔 멀고, 멀다기엔 너무도 가까운 어제니까.

 

그랬던 대추리 사진들을 지난 몇 주에 걸쳐 낱낱이 보았다. 자의반타의반이었다. 강제이주당한 대추리 농민들이 모여 사는 ‘새 대추리’에 농기계창고를 개조한 주민역사관이 준비되고 있고, 개관에 맞춰 작은 사진집을 만들고 싶다는 요청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필름더미를 살피는 내내 심란했다. 거리감을 유지하지 못한 자에게 내려진 심란함이었다. 무엇보다 답답한 건, 과거라 여기고 싶은 그 장면들이 여전히 현재임을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대추리의 장면들은 쌍용차, 용산, 강정마을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한 남자 앞에서 눈을 멈췄다. 모르는 남자였다. 몰랐으나 지금은 아는 남자였다. 그는 대추리 들녘에 몰려든 진압경찰 틈바구니에 끼어 있었다.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몇 장의 연속된 사진 속에서 남자는 이리저리 옷을 붙들린 채 경찰에 묻혀 사라졌다. 그가 그곳에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가 그곳에 있던 장면을 내가 사진으로 담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때 그는 모르는 남자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는 남자.

 

이창근 씨, 너 거기 있었구나. 쌍용차 노동조합 대변인, 2009년 옥쇄파업 당시 구속노동자, 스물두명의 동료들이 한 명 한 명 한 줌 재가 될 때마다 눈물로 보도자료를 썼던 사람, 희망버스 기획단원.

 

주강이 아빠, 당신이 내 필름 속에 있는 줄 몰랐어. 가슴팍에 ‘쌍용’이라고 박아 넣은 글씨를 보았어. 그때는 쌍용노동자, 지금은 해고노동자. 그때는 모르던 남자, 지금은 아는 남자.

 

 

 

 

2012.7

www.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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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생각, 잡글/잡글2012/08/04 09:14

 

 

 

사람이야말로 사람을 비참하게 하지만, 더위도 사람을 그리한다. 하지만 이것은 더위가 만든 사람의 풍경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더위의 풍경. 내가 휘두른 주먹에 내가 맞아 휘청대는 꼬락서니. “지구 평균기온이 3도 오르면 양서류 전멸, 포유류 반토막”이라는 경고가 뚫린 땀구멍으로 흐르는 말복의 저녁. 북한산 건너 작은 절의 배부른 견공보살은 살기 위해 말복을 견디는 게 아니라, 살리기 위해 말복을 건넌다. 생명은 배부름으로 다가온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461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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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춘은, 미래를 예약하지

 

 

 

 

우리의 미래가, 우리의 오늘보다 나아져야 한다는 명제는 옳을 수도 있지만, 슬플 수도 있다.

슬프다. 그것은 옳기 때문이다, 반박을 거절한다.

 

오늘을 응시하는 미래는, 슬프지 않을 도리가 없다. ‘지금, 여기’를 바라본다는 건 슬프거나 슬픔을 견디는 일이다. 오늘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떠들어대는 미래라면, 그것은 악몽. 우리는 계속, 슬픔을 유지해야 한다.

 

대관절 미래는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얼마나 대단하려고, 이토록 우리를 잡아가두는 것일까. 왜, 우리는 미래지향적이라야 대접받는 것일까. 그것은 미래의 우리가, 오늘의 우리보다 나아져야 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옳게 여겨져, 반박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로 인한 슬픔은, 파시즘의 슬픔이다. 한때의 예술사조, 가장 진취적인 것처럼 보였던, 심지어 이름마저 미래지향적이었던 ‘미래주의’가 어떻게 파시즘의 충직한 종이 되었는지를 돌이켜 보는 것은 그래서 슬프다.

 

정치는 과거와 손잡지만, 미래와 논다. 미래는, 힘에 기댄다. 정치는 말장난이다. 장난은 아니지만, 말로 논다. 가장 보수적인 정치집단이 ‘오늘 만족적’이거나 ‘과거 지향적’임을 표방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름에 ‘선진’과 ‘미래’를 즐겨 사용하는 것은 이러한 말장난의 전형이다. 그들은 강박에 시달린다. 그것은 과거와 오늘을 숨기려는 은폐의 강박인 동시에, 그로써 미래를 포획하겠노라는 욕망의 강박이다. ‘과거는 별 볼 일 없지, 충분히 즐겼으므로. 문제는 슬픈 오늘이 아니라, 불만스런 오늘이고, 따라서 미래는 우리 것이어야 해!’

 

극단의 사익을 추구했던, 그리하여 국가를 변란사태로 몰아넣었던 이들이 국익을 선언하고, 이순(耳順)부터 귀를 닫은 채 나이를 다시 세는 노병들이 이팔청춘 혈기로 미래를 다짐하는 건, 정신분열의 징후라기보다는 회춘의 갈망이다. 회춘이란, 얼마나 미래지향적인가.

 

그들이 모였다. 이등병으로 강등된 쿠데타의 수괴가 미래안보를 책임질 예비장교들의 사열을 받는다. “충성!” 그러자 광주를 피로 물들였던 ‘하나회’ 졸개들이 국방회관에 모여 ‘종북세력의 실체와 대응책’을 논하고, ‘주사파 국회침투 및 10만명 암약설’을 유포한다. 63년전 국회프락치 사건을 수술대 위에 올리고, 21세기 이념처방전에 “몽둥이가 약”이라 서명한다. 19대 국회의장에 전두환을 “정치생활의 멘토”로 삼는 하나회 출신을 침투시킨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선 초대형 펼침막이 구호를 외친다. “종북정당 해체하라!” 세금 내지 않는 목사님과 세금 거덜내는 정치인이 사이좋게 주먹을 쥔다. 누군가 외친다. “이석기, 김재연에게 감사합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왜들 이러실까. 박정희를 아빠라 부르고, 전두환을 오빠라 불렀다던 공주님이 미소로 대답할지 모른다.

 

유신은 무엇을 꿈꾸었나. 영원한 새로움이었다. 과거의 생략이자, 오늘 없는 미래였다. 그것은, 지속되어 온 슬픔의 예약이다.

 

 

 

 

2012.7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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