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겠어
1. 어떻게 해야, 나는 내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것은 가능한 일일까.
내가 나임을 증명하라는 당신의 명령을 거부한다면, 나는 더 이상 내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 그 거부는 내가 나라는 걸 부인했다는 증명이 될 수 있을까.
매카시가 돌아왔다, 고 말하지 말자. 늘 곁에 두고 살아왔는데 이 무슨 안이한 현실인식인가. 해방이후 한반도는 단 한 번도 매카시 공화국이 아닌 적이 없었다. 심지어 북녘까지도.
남북의 국민/인민들은 언제나 존재증명의 절대의무를 짊어졌으며, 그 실천은 말 그대로 “나는, 이쪽에 충성하는 나입니다. 고로 저쪽을 증오하는 나입니다.”라고 선언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끝일까. 그것으로 믿어줄까. 충성과 증오를 증명해 보이라는 추가주문이 떨어진다. 아득하다. 의심스럽다면, 아니 의심하고자 한다면, 사실은 벗어날 방법이 없다. 증명의 방법이 마땅찮다는 것이, 그들에겐 무기요, 내겐 무기력이다. 체제의 돋보기로 반체제를 주시하겠다는데, “당신이 들고 있는 건 돋보기입니다. 확대경이라는 뜻이지요. 당신의 눈에는 실재보다 사물이 커 보일 수 있습니다.”라고 지적하는 건, 그 자체로 반체제적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읊조려 본다. 불세출의 영웅, 매카시 장군님은 죽어서도 한반도를 다스리십니다!
2. 개새끼라니. 누군가를 개새끼라 불러야, 내가 사람임이 증명된다니, 사람이란 얼마나 간편한 존재인가. 누군가를 쥐새끼라 부름으로써 내가 사람임을 증명하고 싶지는 않다는 바로 그 이유로, 나는 다른 누군가를 개새끼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데, 그러면 나도 모르게 종북세력이 된단 말인가. 하, 사람이란 얼마나 복잡한 개새끼인가.
3. 내 머릿속에는 60년 전 미국에서 벌어진 광란의 풍경과 15년 전 한국에서 벌어진 질주의 풍경이 함께 떠다닌다. 매카시는 폭로전문가였다. 증명 없는 폭로라는 점에서 그는 폭로전문가라 부를 수도 없는 자였다. <한국논단>이 야심차게 마련했던 ‘대선후보 사상검증 대토론회’는 애국자가 어떻게 검사 코스프레 하는가를 보여준 쇼였다. 논단이라기보다는 농담이거나 농간이었다.
4. 통합진보당의 이른바 (구)당권파가 보여준 행태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 실망스러운 자들을 이런 식으로 벌주는 게 온당한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패권주의자들은 종북주의자들인가, 정말로 김정일을 찬양하고 대를 이어 김정은에 충성하는 자들인가. 내겐 종북이라는 말이, 마녀라는 말처럼 들린다. 매카시가 좋아했던 말은 “빨갱이 냄새”였다. 중세의 마녀 판별기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한 짓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이, 뇌를 해부하라는 명령의 이유가 되는가. 생각이 죄인가. 그것이 죄라면, 집행자는 신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 따위가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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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6
<망각기계>전시, 6월 10일 종료 예정이었으나, 24일까지 2주 연장되었습니다.
요즘 활개치는 전두환과 5공 잔당들의 모습은, 오월광주가 어떻게 망각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해 씁쓸하군요.
아울러 사진집도 출간되었습니다. 전시에는 포함되지 않은 긴 분량의 '대담'이 함께 실려 있습니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7162225
돈의 맛, 피 비린내와 생선 비린내
내가 처음 강정마을을 찾았던 건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4년 전 어느 날, 문정현 신부께서 전화를 걸어왔다. “제주도를 잠시 다녀올까 하는데, 함께 가지 않을 테야?” 비행기표를 끊어주겠다는 말에 홀딱 넘어가 그와 동승했다. 나 같은 ‘육지 것’에게 제주도는 언제라도 가보고 싶은 섬이오, 꿈과 낭만이 손짓하는 곳이었으니까. 허나 바다 건너라는 물리적 거리감과 무엇보다 만만찮은 교통비로 인한 심리적 거리감이 발목을 붙드는 ‘먼 곳’이었으니까. 공짜라니, 일단 가자.
공짜는 없었다. 문 신부는 내게 요청했다.
“알다시피 강정마을은 멀어. 해군기지문제가 기습적으로 마을을 덮치는 바람에 어려움이 많은 모양이야. 뭐라도 도움을 줘야할 텐데, 이렇게 먼 곳이니 자주 오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눌러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상단’을 꾸릴까 해.”
돈을 주고 싶다는 얘기였다. 위기에 처한 작은 마을의 문제를 알리는 동시에, 마을주민들이 처한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주는 사업을 해보자는 얘기였다. 쉽게 말해 고등어 감귤 장사를 하겠다는 통보였다. 이런, 잘못 걸려들었구나.
허나 다행히도 내게 요청된 일은, 호객행위가 아니라 사진이었다. 장사를 하려면 이른바 ‘찌라시’가 필요한 법. 그러므로 전단지에 들어갈 고등어와 갈치, 감귤과 한라봉 사진을 찍어달라는 말이었다. 나는 안심했다. 이렇게 잠시 상업사진가의 경력을 쌓는구나, 생각하니 우쭐한 마음마저 들었다. 제대로 된 ‘찌라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에, 알고 지내던 디자이너에게 최고 품질의 ‘꼬등어 찌라시’를 주문했다. “나도 공짜로 찍었으니, 당신도 공짜로 디자인하길 바라오! 다만 고품질의 찌라시라야 하오!”
디자이너의 조심스런 제안에 전단지는 폐기됐다. 대신 강정의 아름다운 풍광을 담은 작고 예쁜 탁상달력이 만들어졌다. 사진 덕분은 전혀 아니지만, 고등어 사업은 대성공이었다. 물건이 좋았고, 뜻이 좋았다. 값도 비싸지 않았다. 수익금은 오롯이 마을에 전달됐다. 피 비린 내가 아니라, 생선 비린내가 나는 돈이어서 좋았다. 돈의 맛에 주민들은 울먹였다.
멀어서 ‘돈이라도’ 돕고 싶다던 문정현 신부는, 마을상황이 험해지자 ‘몸이라도’ 던지겠노라 아예 강정주민이 되었다. 마을은 전쟁터가 되었다. 칠순 넘은 노 사제가 덩치 큰 용역에게 멱살 잡히고, 포구에서 떨어져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강정에서 싸우고 있는 숱한 평화활동가들은 너나없이 ‘문정현들’이다. 구럼비를 살려달라 호소했을 뿐인데, 지금까지 누적된 연행·구속자 수만 400여명, 빌어먹을 벌금만 3억원이다. 주민과 평화활동가들은 국가의 폭력에, 돈의 폭력에 신음하고 있다.
이들의 호소를 귀담아 듣기 위해, 힘내시라 격려하기 위해, 고등어 사먹고, 감귤 사먹고, 작은 후원금을 보낸 것이 잘못된 일일까? 계좌추적이란다. 부패계좌엔 손도 못대던 자들이, 눈물어린 후원계좌를 뒤지겠단다. 치졸하다. 잔인하다. 강정마을에서 국가는 양아치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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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5